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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소네 야스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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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1918년 군마현에서 태어나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제국 해군에서 복무했다. 1947년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된 후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과학기술청 장관, 운수대신, 방위청 장관 등을 역임했다. 1982년부터 1987년까지 내각총리대신을 지내며 행정 개혁, 국철 민영화, 대미 관계 개선 등을 추진했다. 그는 헌법 개정을 평생의 과업으로 여겼으며, 2019년 10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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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소네 야스히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식 초상, 1982년
이름나카소네 야스히로
출생일1918년 5월 27일
출생지다카사키시, 군마현, 일본 제국
사망일2019년 11월 29일
사망지도쿄도, 일본
서명NakasoneY kao.png
배우자나카소네 츠타코 (2012년 11월 7일 사망)
자녀나카소네 히로후미
모교도쿄 대학
종교불교와 신토
웹사이트YATCHAN'S WORLD (2011년 2월 9일 아카이브)
로마자 표기Nakasone Yasuhiro
별명야스
정치 경력
직위내각총리대신
재임 기간1982년 11월 27일 ~ 1987년 11월 6일
군주쇼와 천황
부총리가네마루 신
전임스즈키 젠코
후임다케시타 노보루
소속 정당자유민주당
자유민주당 총재1982년 11월 25일 ~ 1987년 10월 31일
자유민주당 총재니카이도 스스무
자유민주당 간사장니카이도 스스무, 다나카 로쿠스케, 가네마루 신, 다케시타 노보루, 아베 신타로
전임 총재스즈키 젠코
후임 총재다케시타 노보루
중의원 의원1947년 4월 26일 ~ 2004년 10월 10일
선거구군마 3구 (1947–1996), 북간토 비례대표 (1996–2004)
소속 정당 (역대)민주당, 국민민주당, 개진당, 일본민주당, 자유민주당 (무파벌→구 고노파나카소네파), 무소속→ 자유민주당 (무라카미파→에토·가메이파)
칭호 및 훈장종1위, 대훈위국화장경식, 대훈위국화대수장, 레지옹 도뇌르 훈장 (프랑스), 중의원명예의원 자격자, 법학사 (도쿄제국대학, 1941년), 루이 파스퇴르 대학교 명예박사, 상하이 교통대학교 명예교수, 군마현 명예현민, 정론대상 특별상
국회의원20회 당선
군사 경력
소속일본 제국 해군
복무 기간1941년–1945년
계급해군 대위 (해군 주계장교)
참전 전투제2차 세계 대전
관료 경력
역임 직책행정관리청 장관, 통상산업대신, 과학기술청 장관, 원자력위원회 위원장, 방위청 장관, 운수대신
행정관리청 장관 재임 기간1980년 7월 17일 ~ 1982년 11월 27일
통상산업대신 재임 기간1972년 7월 7일 ~ 1974년 12월 9일
과학기술청 장관 및 원자력위원회 위원장 재임 기간1959년 6월 18일 ~ 1960년 7월 19일, 1972년 7월 7일 ~ 1972년 12월 22일
방위청 장관 재임 기간1970년 1월 14일 ~ 1971년 7월 5일
운수대신 재임 기간1967년 11월 25일 ~ 1968년 11월 30일
수상 내각
내각제1차 나카소네 내각,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2차 나카소네 제1차 개조 내각, 제2차 나카소네 제2차 개조 내각, 제3차 나카소네 내각
기타

2. 생애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1918년 5월 27일 군마현 다카사키시에서 목재상을 하던 나카소네 마쓰고로 2세와 나카무라 유쿠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1][2] 형인 키치타로, 누나인 쇼코, 남동생인 료스케를 포함해 다섯 명의 형제자매가 있었으며, 어린 시절 사망한 남동생과 여동생도 있었다.[3] 나카소네 가문은 에도 시대에 사무라이 계급 출신이었으며, 미나모토 요시미쓰를 통해 미나모토 씨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했다.[4] 1590년경 사무라이 나카소네 소에몬 미쓰나가는 고즈케 국의 사토미무라/里見村일본어 (群馬県) 마을에 정착했다. 그의 후손들은 비단 상인과 전당포 주인이 되었다. 나카소네의 아버지는 1912년 다카사키에 정착하여 목재 사업과 목재 야적장을 설립했는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건설 호황으로 사업이 성공했다.[4]나카소네가 학생이었던 시절에는 150명의 기능공이 일했고, 20명 정도의 가정부가 상주했다고 한다.[62]

나카소네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행복한 시절이었고, 자신을 "조용하고 느긋한 아이"로 묘사하며 "야트짱"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다카사키의 지역 초등학교에 다녔고, 4학년까지는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학급 최고의 성적을 유지했다. 구제 다카사키 중학교를 거쳐 구제 시즈오카 고등학교 문과 병류에 진학하여 육상부에 소속되었다.[63] 1935년 시즈오카 고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역사와 문학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으며,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게 되었다.[5] 1938년 가을에는 도쿄 제국 대학교의 법학부에 입학했다.[5] 법학부정치학과를 졸업 후, 내무성에 입성하여 도쿄부 소속이 되었다.[64] 동기 입성자에는 하야카와 다카시와 오자와 다쓰오, 오무라 죠지 등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 제국 해군에 군수 장교로 임관되었다.[2]

일본 제국 해군 시절의 나카소네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1941년 도쿄 제국대학 졸업 후 "해군 단기 현역 제도"에 따라 일본 제국 해군 주계위로 임관했다.[65] 같은 해 8월 아오바에 배치되어 고치현 부근 태평양 해역에서 훈련을 받았다.[66] 11월에는 구레 진수부 제2설영대 주계장으로 임명되어 3000명의 대원과 함께 물자 조달 임무를 수행했다.[68]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나카소네는 수송선단을 이끌고 필리핀 민다나오섬 다바오에 상륙하여 비행장 건설에 착수했으나, 미군의 B-17 폭격으로 건설을 포기했다.[70] 이후 보르네오섬 발릭파판으로 이동하던 중 마카사르 해협에서 수송선 4척이 격침되었다.[71] 1942년 1월 발릭파판 해전에서 일본군 수송선단은 네덜란드군과 영국군의 공격을 받았고, 나카소네가 승선한 배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72][73] 이 전투에서 나카소네는 부하들을 잃었고, 전사한 동료들을 화장하며 깊은 슬픔을 느꼈다.[73]

{{Cquote|'''벗을 태우니 철판을 지고 여름 바닷가'''

'''여름 바다 경례하는 행렬 발에 오지 않네'''}}[74]

나카소네는 전쟁 경험을 통해 "일본 사회의 최전선에서 가장 고생하는 서민"들의 애국심을 느꼈고, 이는 훗날 그가 정치인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75]

이후에도 주계과 장교로서 여러 전투에 동행했으며, 1943년 8월 가오슝 해군시설부 부원으로 임명되었다.[77] 1944년 11월 요코스카 진수부로 이동하였으며, 1945년 종전 당시 계급은 해군 주계 소령이었다.[78]

1985년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나카소네는 태평양 전쟁에 대해 "해서는 안 되는 전쟁이며 잘못된 전쟁"이었다고 인정하며, 중국에 대한 침략 사실을 인정했다.[81][82]

1918년 5월 27일 군마현 다카사키시에서 태어났다.[83] 1941년 3월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내무성에 들어갔다.[83] 1941년 8월 해군경리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11월 해군병비국에서 근무했다.[83] 종전 후 일본군 해산에 따라 내무성으로 복귀하여 관방조사부에서 근무했다.[83] 이때 미군 장교들과의 교류를 통해 미국식 민주주의를 접하는 한편, 일본이 점령된 것에 대한 울분과 분함을 품고 있었던 것도 후에 정치가를 지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83]

1947년 4월 25일 제2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군마현 제3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창당될 때까지 민주당, 국민민주당, 개진당, 일본민주당 순으로 당적을 옮기며 반(反)요시다 시게루 세력으로서 자주 헌법 제정, 군대 보유 금지 조항 반대를 표방하였다.[83] 의장에서는 요시다 정권을 격렬하게 공격했지만, 요시다 개인에 대해서는 "일본을 위해 당당하게 했다. 맥아더 사령부에 가서도 별로 비굴하지 않게 했다"고 평가하며, 오히려 그 배후에 있는 점령 정책에 대한 반발의 발로였다.[83]

1954년 3월 2일에는 일개 국회의원으로서 원자력 연구 개발을 위한 예산을 상정, 이를 통과시키는 데 일조했다.[84]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자 기타무라 도쿠타로와 함께 고노파에 속했다. 1959년 제2차 기시 개조내각에서는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처음 입각했다. 이후 당내에서 두각을 보이며 소속 고노파가 분열되자 자신을 회장으로 하는 나카소네파를 결성했다.

1956년에는 「헌법개정의 노래」를 직접 작사하여 발표하는 등 자민당 내 개헌파로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언론에서는 나카소네에게 "청년 장교"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84] 같은 해 11월 27일, 일본소련 간의 국경 획정과 국교 회복을 합의한 일소 공동 선언 비준을 위한 중의원 본회의에서는 일본사회당일본공산당 의원들이 항의하며 자민당 의원들과 충돌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나카소네의 약 50분간의 연설 전문이 중의원 회의록에서 삭제되기도 했다.[84]

초선 당시 흰색으로 칠한 자전거에 일장기를 꽂아놓고 돌아다니며 선거 운동을 한 것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것부터 유명세를 탄 나카소네는 젊었을 때부터 총리직을 지향한다고 과감하게 밝히기도 했고, 헌법 개정이나 총리 공선론 주장 등 대담한 발언과 퍼포먼스를 좋아했으며, 큰 체격과 단정한 외모가 주목받으면서 일찍부터 언론과 정계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1965년, 후쿠이현 구즈류 댐 시공사 선정을 둘러싼 비리 사건에 나카소네의 이름이 오르내리며 의혹을 받기도 했다.[85] 일본공산당의 기관지 『신문 아카하타』는 나카소네가 행정관리청 장관 재임 시절인 1980년에 치러진 제3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후지쯔와 일본제작소에서 불법 정치 자금을 받았다고 보도하기도 했다.[85]

1967년 제2차 사토 제1차 개조내각에서 운수대신을, 1970년 제3차 사토 내각에서는 방위청 장관을 역임했다. 운수대신으로 입각했을 때에는 입각 이전에 나카소네가 사토 에이사쿠 내각을 "우익 편중 내각"이라고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입각했기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철새"라는 야유를 받았고, 이후 이 별명이 나카소네의 대명사가 되었다.[83]

운수대신 시절에는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을 둘러싼 산리즈카 투쟁 등 여러 분쟁에 개입하였고, 1968년 4월 6일에는 도모노 다케토 지바현 지사와 함께 신도쿄국제공항공단을 찾아 신공항 조건부 찬성파와 "토지 매각에 관한 각서"를 교환했다.[86] 또 같은 해 8월 9일 자신의 집에 예고도 없이 찾아온 시민운동가 도무라 잇사쿠 등 반대 단체 인사들을 집 안으로 들어오게 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86] 또 이에 앞서 공항공단 간부의 사전 약속 없는 집 방문 때에도 나카소네는 토지 매입 단가를 올려서 밭 한 반(反) 당 일률 110만엔으로 책정하도록 했으며, 이것이 각서 체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87]

방위청 장관 시절 미시마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는 이를 비판하는 성명을 방위청 장관 명의로 냈는데, 당사자인 미시마 유키오와 가까운 일부 보수계 단체나 민족파 세력, 우익 단체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정부 요직을 거치는 동안 나카소네는 미키 다케오,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 마사요시, 후쿠다 다케오와 함께 이른바 "삼각 찹쌀떡"이라 불리며 사토 에이사쿠의 후계자가 될 "포스트 사토"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1972년 자민당 총재 선거 때에는 다나카 가쿠에이 지지로 돌아섰다. 나카소네의 지지는 다나카가 후쿠다를 누르고 차기 총재에 당선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다나카가 돈을 이용해 지지자를 포섭한 것이 아닌가"라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이후에도 여러 억측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나카소네파는 당내에서 영향력이 작은 소수 파벌에 속했기 때문에 자민당 내 파벌들의 합종연횡에 휘말리기 쉬웠을 뿐만 아니라 자금 조달에도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쇼쿠산 주택 사건으로 기소된 도고 다미야스가 자민당 총재 선거 때 나카소네가 자금을 제공받기 위해 일부러 자신의 회사 주식의 일부를 매매했다고 주장하면서 나카소네가 1977년에 국회 증인 소환을 받는 등 정치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89][90][91]

1972년 출범한 제1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는 통상산업대신 겸 과학기술청 장관을 지냈으며, 제2차 내각에서는 과학기술청 장관을 겸임하지 않고 통상산업대신을 전임하게 되었다. 미키 내각 기간에는 내각을 떠나 당직인 자민당 간사장을 맡았다.

1976년 록히드 사건이 발생하자 나카소네의 관여 정황이 드러나 측근인 사토 고코가 체포되었지만, 당내에서 나카소네 본인에게까지 사임 요구가 나오지는 않았다. 이후 야당은 물론 자민당 내에서조차 "(교도소) 담장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다가 교도소 안쪽에 떨어진 것이 다나카 가쿠에이, 바깥쪽에 떨어져 훈장까지 받은 것이 나카소네 야스히로"라는 야유가 나오기도 했다. 같은 해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록히드 사건을 둘러싼 의혹 때문에 나카소네의 낙선을 예상하는 분위기였지만, 결과적으로 당선자 정수가 4명인 나카소네의 지역구(군마현 제3구)에서 당선권에서도 최하위인 4위의 득표를 하면서 간신히 당선 턱걸이에 성공했다. 이후 후쿠다 다케오 내각 기간에는 자민당 총무회장을 맡았다.

1978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는 "메이지 시대에 태어난 노인이 다 해먹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며 세대 교체를 호소하는 식으로 총재 선거 입후보를 선언했으며, 예비 선거 결과 오히라가 1위에 올랐고 나카소네는 3위를 기록했다. 결과적으로 새 총재에는 오히라가 당선되었고, 제1차 오히라 내각 기간에 이루어진 당직 인선에서 나카소네가 오히라에게 간사장직을 요구하자 오히라는 역으로 나카소네에게 각료인 대장대신(현재의 재무대신)직을 제안했으나, 나카소네는 이를 거부했다.[93] 이후 나카소네는 당내에서 오히라에 반대하는 비주류파로서 이른바 "40일 항쟁"이라고 불리는 자민당 내 주류파와 비주류파의 갈등 사태에서도 반(反)오히라 연합에 속했지만, 결국 당내에서 다나카 가쿠에이의 신임을 얻지 못해 차기 자민당 총재 자리를 놓쳤다.

이후 스즈키 젠코 내각 기간 당내 주류파가 되며 단숨에 자민당에서 큰 영향력을 확보하게 된 나카소네는 행정관리청 장관으로 입각해 행정 개혁을 위해 힘썼고, 이에 스즈키 총리의 강한 신임을 얻게 되었다. 나카소네는 당시에 화두가 되고 있던 "재정 재건"의 수단으로서 행정 개혁에 여론의 관심이 모아지는 가운데 행정관리청 장관을 선택하고 그 직무에 열중하면서 훗날 총리 취임 후 국철분할민영화 등 주요 공기업의 민영화에 관한 자문을 맡게 되는 도코 도시오의 신임도 얻게 되었다.

1982년 11월 열린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일본에서 나카소네를 제일 싫어한다"라고 공언했던 가네마루 신과 화해하며 다나카파의 지지를 얻은 나카소네는 총재 선거에서 압도적인 득표로 신임 총재에 당선되었고, 선거 직후 스즈키 젠코를 이을 제71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삼각 찹쌀떡"으로 불린 5명 중에서는 마지막으로 총리에 올랐으며, 이때 나카소네는 총 6번의 각료 경험과 2번의 주요 당직 경험을 거친 뒤였다. 나카소네는 "행정 개혁"과 "전후 정치의 총결산"을 정권의 슬로건으로 내걸고 1987년까지 재임하면서 역대 총리 중 7위(전후 총리 중에서는 5위, 쇼와 시대로 한정하면 3위)의 장기 집권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 나카소네는 기존에 보편적으로 이루어져 왔듯 관료가 정책에 대한 여러 의견을 제시하면 정부가 이를 조정해 최종적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방식의 조정형 정치를 하지 않고, 대신 총리 산하에 다수의 정책 자문 기관을 두어 자문을 받고 총리 본인이 직접 정책을 결정했다. 따라서 총리라기보다는 대통령에 가까운 "톱다운 정치"를 표방한 나카소네의 국정 운영 방식은 퇴임 이후에도 주목을 받으며 "대통령형 총리"라는 별명을 남겼다.

다만 정권 초반기에는 내각관방장관에 다나카파인 고토다 마사하루를 기용하였고, 자민당 간사장에는 록히드 사건에 연루된 적이 있는 니카이도 스스무를 임명하고[98] 내각에도 다나카파 소속을 7명이나 임명하는 등 나카소네 정권 초반기에 다나카 가쿠에이의 영향력이 강했다는 점은 비판을 받는다. "다나카소네 내각", "가쿠에이(角影일본어, ) 내각", "직각(直角일본어, ) 내각" 등과 같은 별명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나카소네가 자민당 총재 자리에 오르는 데 다나카파의 지원이 결정적인 도움이 돠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후 나카소네 정권에 대한 다나카의 영향력은 1983년 10월에 다나카가 록히드 사건의 1심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뒤 나카소네가 "이제부터 다나카 씨의 정치적 영향을 일절 배제하겠다. 정치 윤리를 고양하고, 당 체질의 근본적 쇄신에 힘쓰며, 청결한 당 문화를 확립하겠다"라는 성명을 내며 끝을 보았으나, 이후 같은 해 12월 실시된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수 의석을 획득하지 못하면서 나카소네 정권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록히드 사건 직후 자민당을 탈당한 세력이 결성한 신자유클럽과 연립 정권을 구성하여 제2차 나카소네 내각이 출범하긴 했으나, 나카소네와는 정치 신념이 맞지 않는 다가와 세이이치를 자치대신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해야 했다. 1984년에는 니카이도 스스무 자민당 간사장을 차기 총리로 옹립하자는 주장이 나왔지만 이 주장의 선봉에 섰던 다나카 가쿠에이1985년 2월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사실상 정치 생명을 잃었고, 고토다 마사하루 내각관방장관이 다나카파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카소네에게 협력하면서 정권 운영의 주도권이 사실상 나카소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나카소네는 신자유클럽과의 연정을 끝내고 자민당 단독 정권을 회복하는 것에 집념을 보이며 중의원 해산을 강행, 1986년 7월 6일 중의원참의원 선거가 동시에 치러지게 되었다. 이 선거에서 자민당은 중의원과 참의원 모두 압승을 거두었다. 선거 압승의 대가로 자민당 규약 개정을 통한 당 총재 임기 1년 연장이라는 혜택을 얻게 된 나카소네는 1980년대 후반 자민당이 거의 모든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는 정치 현상을 만든 주역으로서 이름을 남기게 됐다. 이 기간에 치러진 선거에서 나카소네가 "대형 간접세는 도입하지 않습니다", "이 얼굴이 거짓말하는 얼굴로 보입니까"라고 발언한 것은 국내외의 큰 주목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개헌 문제에 있어 총리 재임 기간 중에는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고 개헌을 추진하지도 않았으나, "전후 정치의 총결산"을 내걸고 교육기본법과 "전후 역사 교육"의 재검토, 전후 총리 중 처음으로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 방위비 1% 한도 철폐 등 강한 우익 성향을 드러냈으며, 이에 좌익 세력으로부터 맹반발을 사며 "우익 편중", "군국주의자"라는 칭호가 붙었고, "총결산되어야 할 것은 전후가 아니라 자민당"이라는 질타를 받기도 했다. 교육 개혁에 관해서는 문부성일본교직원조합(일교조)의 극심한 대립 속에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자체 판단에 따라 1984년 자신의 자문 기관으로서 "임시 교육 심의회"를 설치했다. 이후 임시 교육 심의회의 자문을 받으며 여러 교육 정책 수립을 주도하여 나카소네의 퇴임 이후인 1988년에 내각 주도로 "학습 지도 요령"의 개정을 이루었다. 이를 놓고 일본교직원조합(일교조)는 내부 분열에 빠져 세력이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세제 문제에 있어서는 정부세제조사회의 회장으로서 세수의 직간비율을 맞춘다는 관점에서[99] 부가가치세의 도입을 주창한 가토 히로시를 비롯해 이시카와 다다오, 가쓰다 기치타로, 고야마 겐이치, 고보리 게이이치로, 니시 요시유키, 사토 세이자부로 등[100] 자신과 생각을 같이하는 학자들을 각 자문 기관의 중심 인물로 기용해 신속한 결정을 통한 톱다운형 정책 추진에 활용했다. 그러자 자민당 내 비주류파나 야당으로부터 "어용학자의 중용"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1986년에 발생한 이즈오섬 미하라산의 분화 때에는 총리 직권으로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과 남극 관측선을 출동시켜 체류자를 포함한 주민 전원 구출에 성공했다. 직권으로 지시를 내린 데 대해 소관 기관인 국토청의 관료들을 비롯해 야당은 총리의 독단적 결정을 비판했지만, 당시 내각안전보장실장이었던 삿사 아쓰유키 등은 1995년 발생한 한신·아와지 대지진무라야마 내각의 초동 대처 지연과 비교하며 나카소네의 결단력과 실행력을 높게 평가했다. 또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을 둘러싼 산리즈카 투쟁이 당시에도 계속되던 중이었음에도, 나리타 공항 2단계 공사 착공을 결단했다.[101]성풍속 업소의 적발과 선정적인 내용을 담은 TV 프로그램, 영화 규제에도 주력했다. 선정적 TV 프로그램에 관해서는 국회 답변에서 "우선 당분간은 이 부분에 있어서 우정성이 감독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정성 측에서 민영방송 관계자들과도 자주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고, 그래도 불만이 있다면 위에서 직접 검토해서 좋게 처리되도록 할 것이다. 우정성에서는 그걸 잘 체크해보고, 문제가 반복되는 일이 없도록 경고를 하든지 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했으면 한다"라고 말해 이후 일본 TV 프로그램에서 선정적인 내용이 많이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원폭 피해자들이 입원하고 있는 히로시마시의 병원을 시찰한 자리에서 "병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거나 "흑인은 지적 수준이 낮다", "일본에 차별받고 있는 소수민족은 없다"라는 등 나카소네 사무소 관계자가 한 발언에 대해 나카소네 사무소가 사과문을 낸 것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여성 차별적 발언으로 여겨지는 발언을 해서 물의를 빚는 경우도 있었다.

1983년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1986년제3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현직 총리이면서도 지역구에서 1위로 당선되지 않았다(당시 선거 제도는 중선거구제). 이는 역대 총리로는 유일한 기록이다. 나카소네가 1위를 차지하지 못한 두 선거에서 1위로 당선된 것은 모두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인데, 이는 곧 전현직 총리가 같은 선거구(군마현 제3구)에서 대결했다는 것이 된다. 중선거구제 시대의 옛 군마현 제3구는 나카소네와 후쿠다 외에도 총리를 지낸 오부치 게이조일본사회당 서기장을 지낸 야마구치 쓰루오 등 거물들의 지역구로서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경합 지역이었다. 또 일본에서 전직 총리가 선거에서 낙선한 사례는 가타야마 데쓰이시바시 단잔, 가이후 도시키가 있으나, 현직 총리가 선거에서 낙선한 적은 역사상 한번도 없다.

"하이테크 경기"나 "거품 경기"로 대표되는 일본 경제의 호황 속에 내각 지지율도 고공 행진을 이어갔고, 집권 여당인 자민당 역시 중의원과 참의원 선거에서 사상 최다 의석을 획득함과 동시에 임기 후반기에 다나카 가쿠에이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나카소네 정권은 대미 수출에 있어서 고부가가치 제품이 지나치게 호조를 보이면서 미국과의 무역 마찰 문제에 직면했고, 플라자 합의로 이러한 마찰은 해소되었지만 달러화 가치가 하락하고 엔화 가치가 상승하여 일본의 수출 경쟁력이 약화되었다. 따라서 나카소네 내각은 내수 활성화를 위해 "민간 활력"을 내세우며 국철분할민영화에 수반해 일본국유철도 청산사업단국철 소유의 용지를 매각하는 등 대규모로 국유지 매각을 진행했다.[102] 이로 인해 대도시권이나 리조트 개발지를 비롯하여 일본 전국에서 땅값이 폭등했으나 이에 따른 금융긴축정책을 시행하지 않아 거품 경제를 부추겼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또 이런 거품 경제 하에서 횡행한 대규모 주식 투자는 이후 발각되는 리크루트 사건이나 정치인들의 비리 사건에서 불법 자금 문제가 다시 주목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

1986년 중의원참의원 선거가 동시 실시되어 자민당이 압승을 거두었지만, 선거 이후 나카소네는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후지오 마사유키 문부대신이 나카소네의 "자학사관은 부적절하다"라는 발언을 비판하는 글을 잡지에 게재했다가 경질되는가 하면, 나카소네 본인 역시 "흑인은 지적수준이 낮다", "일본은 단일 민족", "여자가 쓴 글이니까" 등의 여러 실언이 도마 위에 올랐고, 나아가 선거 기간 도중 나카소네가 "대형 간접세는 도입하지 않습니다", "이 얼굴이 거짓말하는 얼굴로 보입니까"라며 도입하지 않을 것처럼 말하던 부가가치세를 선거 이후에 돌연 도입하겠다고 선언하면서 "공약 위반"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내각 지지율이 급락했다.

이후 1986년 말, 익년인 1987년도 예산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여야 대립이 격화되어 자민당에 대한 여론이 악화, 익년 4월에 실시된 통일지방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하는 등 나카소네 정권은 위기에 몰렸다. 이후 자민당 3역(간사장, 총무회장, 정무조사회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나아가 내각 총사퇴론까지 나오기 시작했다.[117]당시 당 삼역 중에서 간사장·총무회장을 각각 다케시타 노보루·아베 신타로라는 나카소네 이후의 새로운 지도자들이 맡고 있었기 때문에, 삼역 사퇴로 나카소네의 조기 퇴진을 이끌어내는 동시에, 자신의 시대를 개척하려는 속셈이 있었다. 하지만 이 사퇴론에 대해서는, 또 다른 새로운 지도자인 미야자와 기이치의 모체인 고케카이가 강하게 반발하여, 실현되지 않았다. 미야자와

2. 1. 어린 시절과 교육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1918년 5월 27일 군마현 다카사키시에서 목재상을 하던 나카소네 마쓰고로 2세와 나카무라 유쿠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1][2] 형인 키치타로, 누나인 쇼코, 남동생인 료스케를 포함해 다섯 명의 형제자매가 있었으며, 어린 시절 사망한 남동생과 여동생도 있었다.[3] 나카소네 가문은 에도 시대에 사무라이 계급 출신이었으며, 미나모토 요시미쓰를 통해 미나모토 씨의 직계 후손이라고 주장했다.[4] 1590년경 사무라이 나카소네 소에몬 미쓰나가는 고즈케 국의 사토미무라/里見村일본어 (群馬県) 마을에 정착했다. 그의 후손들은 비단 상인과 전당포 주인이 되었다. 나카소네의 아버지는 1912년 다카사키에 정착하여 목재 사업과 목재 야적장을 설립했는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건설 호황으로 사업이 성공했다.[4]나카소네가 학생이었던 시절에는 150명의 기능공이 일했고, 20명 정도의 가정부가 상주했다고 한다.[62]

나카소네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행복한 시절이었고, 자신을 "조용하고 느긋한 아이"로 묘사하며 "야트짱"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다카사키의 지역 초등학교에 다녔고, 4학년까지는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그 이후로는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학급 최고의 성적을 유지했다. 구제 다카사키 중학교를 거쳐 구제 시즈오카 고등학교 문과 병류에 진학하여 육상부에 소속되었다.[63] 1935년 시즈오카 고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역사와 문학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으며,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게 되었다.[5] 1938년 가을에는 도쿄 제국 대학교의 법학부에 입학했다.[5] 법학부정치학과를 졸업 후, 내무성에 입성하여 도쿄부 소속이 되었다.[64] 동기 입성자에는 하야카와 다카시와 오자와 다쓰오, 오무라 죠지 등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 제국 해군에 군수 장교로 임관되었다.[2]

2. 2. 해군 복무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1941년 도쿄 제국대학 졸업 후 "해군 단기 현역 제도"에 따라 일본 제국 해군 주계위로 임관했다.[65] 같은 해 8월 아오바에 배치되어 고치현 부근 태평양 해역에서 훈련을 받았다.[66] 11월에는 구레 진수부 제2설영대 주계장으로 임명되어 3000명의 대원과 함께 물자 조달 임무를 수행했다.[68]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 나카소네는 수송선단을 이끌고 필리핀 민다나오섬 다바오에 상륙하여 비행장 건설에 착수했으나, 미군의 B-17 폭격으로 건설을 포기했다.[70] 이후 보르네오섬 발릭파판으로 이동하던 중 마카사르 해협에서 수송선 4척이 격침되었다.[71] 1942년 1월 발릭파판 해전에서 일본군 수송선단은 네덜란드군과 영국군의 공격을 받았고, 나카소네가 승선한 배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72][73] 이 전투에서 나카소네는 부하들을 잃었고, 전사한 동료들을 화장하며 깊은 슬픔을 느꼈다.[73]

{{Cquote|'''벗을 태우니 철판을 지고 여름 바닷가'''

'''여름 바다 경례하는 행렬 발에 오지 않네'''}}[74]

나카소네는 전쟁 경험을 통해 "일본 사회의 최전선에서 가장 고생하는 서민"들의 애국심을 느꼈고, 이는 훗날 그가 정치인의 길을 걷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75]

이후에도 주계과 장교로서 여러 전투에 동행했으며, 1943년 8월 가오슝 해군시설부 부원으로 임명되었다.[77] 1944년 11월 요코스카 진수부로 이동하였으며, 1945년 종전 당시 계급은 해군 주계 소령이었다.[78]

1985년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나카소네는 태평양 전쟁에 대해 "해서는 안 되는 전쟁이며 잘못된 전쟁"이었다고 인정하며, 중국에 대한 침략 사실을 인정했다.[81][82]

2. 3. 정치 경력

1918년 5월 27일 군마현 다카사키시에서 태어났다.[83] 1941년 3월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내무성에 들어갔다.[83] 1941년 8월 해군경리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11월 해군병비국에서 근무했다.[83] 종전 후 일본군 해산에 따라 내무성으로 복귀하여 관방조사부에서 근무했다.[83] 이때 미군 장교들과의 교류를 통해 미국식 민주주의를 접하는 한편, 일본이 점령된 것에 대한 울분과 분함을 품고 있었던 것도 후에 정치가를 지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83]

1947년 4월 25일 제2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군마현 제3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창당될 때까지 민주당, 국민민주당, 개진당, 일본민주당 순으로 당적을 옮기며 반(反)요시다 시게루 세력으로서 자주 헌법 제정, 군대 보유 금지 조항 반대를 표방하였다.[83] 의장에서는 요시다 정권을 격렬하게 공격했지만, 요시다 개인에 대해서는 "일본을 위해 당당하게 했다. 맥아더 사령부에 가서도 별로 비굴하지 않게 했다"고 평가하며, 오히려 그 배후에 있는 점령 정책에 대한 반발의 발로였다.[83]

1954년 3월 2일에는 일개 국회의원으로서 원자력 연구 개발을 위한 예산을 상정, 이를 통과시키는 데 일조했다.[84]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자 기타무라 도쿠타로와 함께 고노파에 속했다. 1959년 제2차 기시 개조내각에서는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처음 입각했다. 이후 당내에서 두각을 보이며 소속 고노파가 분열되자 자신을 회장으로 하는 나카소네파를 결성했다.

1956년에는 「헌법개정의 노래」를 직접 작사하여 발표하는 등 자민당 내 개헌파로 활발하게 활동하였고, 언론에서는 나카소네에게 "청년 장교"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84] 같은 해 11월 27일, 일본소련 간의 국경 획정과 국교 회복을 합의한 일소 공동 선언 비준을 위한 중의원 본회의에서는 일본사회당일본공산당 의원들이 항의하며 자민당 의원들과 충돌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나카소네의 약 50분간의 연설 전문이 중의원 회의록에서 삭제되기도 했다.[84]

초선 당시 흰색으로 칠한 자전거에 일장기를 꽂아놓고 돌아다니며 선거 운동을 한 것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것부터 유명세를 탄 나카소네는 젊었을 때부터 총리직을 지향한다고 과감하게 밝히기도 했고, 헌법 개정이나 총리 공선론 주장 등 대담한 발언과 퍼포먼스를 좋아했으며, 큰 체격과 단정한 외모가 주목받으면서 일찍부터 언론과 정계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1965년, 후쿠이현 구즈류 댐 시공사 선정을 둘러싼 비리 사건에 나카소네의 이름이 오르내리며 의혹을 받기도 했다.[85] 일본공산당의 기관지 『신문 아카하타』는 나카소네가 행정관리청 장관 재임 시절인 1980년에 치러진 제3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후지쯔와 일본제작소에서 불법 정치 자금을 받았다고 보도하기도 했다.[85]

1967년 제2차 사토 제1차 개조내각에서 운수대신을, 1970년 제3차 사토 내각에서는 방위청 장관을 역임했다. 운수대신으로 입각했을 때에는 입각 이전에 나카소네가 사토 에이사쿠 내각을 "우익 편중 내각"이라고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입각했기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철새"라는 야유를 받았고, 이후 이 별명이 나카소네의 대명사가 되었다.[83]

운수대신 시절에는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을 둘러싼 산리즈카 투쟁 등 여러 분쟁에 개입하였고, 1968년 4월 6일에는 도모노 다케토 지바현 지사와 함께 신도쿄국제공항공단을 찾아 신공항 조건부 찬성파와 "토지 매각에 관한 각서"를 교환했다.[86] 또 같은 해 8월 9일 자신의 집에 예고도 없이 찾아온 시민운동가 도무라 잇사쿠 등 반대 단체 인사들을 집 안으로 들어오게 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86] 또 이에 앞서 공항공단 간부의 사전 약속 없는 집 방문 때에도 나카소네는 토지 매입 단가를 올려서 밭 한 반(反) 당 일률 110만엔으로 책정하도록 했으며, 이것이 각서 체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87]

방위청 장관 시절 미시마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는 이를 비판하는 성명을 방위청 장관 명의로 냈는데, 당사자인 미시마 유키오와 가까운 일부 보수계 단체나 민족파 세력, 우익 단체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정부 요직을 거치는 동안 나카소네는 미키 다케오,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 마사요시, 후쿠다 다케오와 함께 이른바 "삼각 찹쌀떡"이라 불리며 사토 에이사쿠의 후계자가 될 "포스트 사토" 중 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1972년 자민당 총재 선거 때에는 다나카 가쿠에이 지지로 돌아섰다. 나카소네의 지지는 다나카가 후쿠다를 누르고 차기 총재에 당선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다나카가 돈을 이용해 지지자를 포섭한 것이 아닌가"라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이후에도 여러 억측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나카소네파는 당내에서 영향력이 작은 소수 파벌에 속했기 때문에 자민당 내 파벌들의 합종연횡에 휘말리기 쉬웠을 뿐만 아니라 자금 조달에도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쇼쿠산 주택 사건으로 기소된 도고 다미야스가 자민당 총재 선거 때 나카소네가 자금을 제공받기 위해 일부러 자신의 회사 주식의 일부를 매매했다고 주장하면서 나카소네가 1977년에 국회 증인 소환을 받는 등 정치 활동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89][90][91]

1972년 출범한 제1차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에서는 통상산업대신 겸 과학기술청 장관을 지냈으며, 제2차 내각에서는 과학기술청 장관을 겸임하지 않고 통상산업대신을 전임하게 되었다. 미키 내각 기간에는 내각을 떠나 당직인 자민당 간사장을 맡았다.

1976년 록히드 사건이 발생하자 나카소네의 관여 정황이 드러나 측근인 사토 고코가 체포되었지만, 당내에서 나카소네 본인에게까지 사임 요구가 나오지는 않았다. 이후 야당은 물론 자민당 내에서조차 "(교도소) 담장 위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가다가 교도소 안쪽에 떨어진 것이 다나카 가쿠에이, 바깥쪽에 떨어져 훈장까지 받은 것이 나카소네 야스히로"라는 야유가 나오기도 했다. 같은 해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록히드 사건을 둘러싼 의혹 때문에 나카소네의 낙선을 예상하는 분위기였지만, 결과적으로 당선자 정수가 4명인 나카소네의 지역구(군마현 제3구)에서 당선권에서도 최하위인 4위의 득표를 하면서 간신히 당선 턱걸이에 성공했다. 이후 후쿠다 다케오 내각 기간에는 자민당 총무회장을 맡았다.

1978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는 "메이지 시대에 태어난 노인이 다 해먹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며 세대 교체를 호소하는 식으로 총재 선거 입후보를 선언했으며, 예비 선거 결과 오히라가 1위에 올랐고 나카소네는 3위를 기록했다. 결과적으로 새 총재에는 오히라가 당선되었고, 제1차 오히라 내각 기간에 이루어진 당직 인선에서 나카소네가 오히라에게 간사장직을 요구하자 오히라는 역으로 나카소네에게 각료인 대장대신(현재의 재무대신)직을 제안했으나, 나카소네는 이를 거부했다.[93] 이후 나카소네는 당내에서 오히라에 반대하는 비주류파로서 이른바 "40일 항쟁"이라고 불리는 자민당 내 주류파와 비주류파의 갈등 사태에서도 반(反)오히라 연합에 속했지만, 결국 당내에서 다나카 가쿠에이의 신임을 얻지 못해 차기 자민당 총재 자리를 놓쳤다.

이후 스즈키 젠코 내각 기간 당내 주류파가 되며 단숨에 자민당에서 큰 영향력을 확보하게 된 나카소네는 행정관리청 장관으로 입각해 행정 개혁을 위해 힘썼고, 이에 스즈키 총리의 강한 신임을 얻게 되었다. 나카소네는 당시에 화두가 되고 있던 "재정 재건"의 수단으로서 행정 개혁에 여론의 관심이 모아지는 가운데 행정관리청 장관을 선택하고 그 직무에 열중하면서 훗날 총리 취임 후 국철분할민영화 등 주요 공기업의 민영화에 관한 자문을 맡게 되는 도코 도시오의 신임도 얻게 되었다.

1982년 11월 열린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일본에서 나카소네를 제일 싫어한다"라고 공언했던 가네마루 신과 화해하며 다나카파의 지지를 얻은 나카소네는 총재 선거에서 압도적인 득표로 신임 총재에 당선되었고, 선거 직후 스즈키 젠코를 이을 제71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다. "삼각 찹쌀떡"으로 불린 5명 중에서는 마지막으로 총리에 올랐으며, 이때 나카소네는 총 6번의 각료 경험과 2번의 주요 당직 경험을 거친 뒤였다. 나카소네는 "행정 개혁"과 "전후 정치의 총결산"을 정권의 슬로건으로 내걸고 1987년까지 재임하면서 역대 총리 중 7위(전후 총리 중에서는 5위, 쇼와 시대로 한정하면 3위)의 장기 집권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 나카소네는 기존에 보편적으로 이루어져 왔듯 관료가 정책에 대한 여러 의견을 제시하면 정부가 이를 조정해 최종적으로 정책을 결정하는 방식의 조정형 정치를 하지 않고, 대신 총리 산하에 다수의 정책 자문 기관을 두어 자문을 받고 총리 본인이 직접 정책을 결정했다. 따라서 총리라기보다는 대통령에 가까운 "톱다운 정치"를 표방한 나카소네의 국정 운영 방식은 퇴임 이후에도 주목을 받으며 "대통령형 총리"라는 별명을 남겼다.

다만 정권 초반기에는 내각관방장관에 다나카파인 고토다 마사하루를 기용하였고, 자민당 간사장에는 록히드 사건에 연루된 적이 있는 니카이도 스스무를 임명하고[98] 내각에도 다나카파 소속을 7명이나 임명하는 등 나카소네 정권 초반기에 다나카 가쿠에이의 영향력이 강했다는 점은 비판을 받는다. "다나카소네 내각", "가쿠에이(角影일본어, ) 내각", "직각(直角일본어, ) 내각" 등과 같은 별명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나카소네가 자민당 총재 자리에 오르는 데 다나카파의 지원이 결정적인 도움이 돠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후 나카소네 정권에 대한 다나카의 영향력은 1983년 10월에 다나카가 록히드 사건의 1심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뒤 나카소네가 "이제부터 다나카 씨의 정치적 영향을 일절 배제하겠다. 정치 윤리를 고양하고, 당 체질의 근본적 쇄신에 힘쓰며, 청결한 당 문화를 확립하겠다"라는 성명을 내며 끝을 보았으나, 이후 같은 해 12월 실시된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수 의석을 획득하지 못하면서 나카소네 정권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록히드 사건 직후 자민당을 탈당한 세력이 결성한 신자유클럽과 연립 정권을 구성하여 제2차 나카소네 내각이 출범하긴 했으나, 나카소네와는 정치 신념이 맞지 않는 다가와 세이이치를 자치대신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해야 했다. 1984년에는 니카이도 스스무 자민당 간사장을 차기 총리로 옹립하자는 주장이 나왔지만 이 주장의 선봉에 섰던 다나카 가쿠에이1985년 2월에 뇌경색으로 쓰러져 사실상 정치 생명을 잃었고, 고토다 마사하루 내각관방장관이 다나카파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카소네에게 협력하면서 정권 운영의 주도권이 사실상 나카소네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나카소네는 신자유클럽과의 연정을 끝내고 자민당 단독 정권을 회복하는 것에 집념을 보이며 중의원 해산을 강행, 1986년 7월 6일 중의원참의원 선거가 동시에 치러지게 되었다. 이 선거에서 자민당은 중의원과 참의원 모두 압승을 거두었다. 선거 압승의 대가로 자민당 규약 개정을 통한 당 총재 임기 1년 연장이라는 혜택을 얻게 된 나카소네는 1980년대 후반 자민당이 거의 모든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는 정치 현상을 만든 주역으로서 이름을 남기게 됐다. 이 기간에 치러진 선거에서 나카소네가 "대형 간접세는 도입하지 않습니다", "이 얼굴이 거짓말하는 얼굴로 보입니까"라고 발언한 것은 국내외의 큰 주목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개헌 문제에 있어 총리 재임 기간 중에는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고 개헌을 추진하지도 않았으나, "전후 정치의 총결산"을 내걸고 교육기본법과 "전후 역사 교육"의 재검토, 전후 총리 중 처음으로 야스쿠니 신사 공식 참배, 방위비 1% 한도 철폐 등 강한 우익 성향을 드러냈으며, 이에 좌익 세력으로부터 맹반발을 사며 "우익 편중", "군국주의자"라는 칭호가 붙었고, "총결산되어야 할 것은 전후가 아니라 자민당"이라는 질타를 받기도 했다. 교육 개혁에 관해서는 문부성일본교직원조합(일교조)의 극심한 대립 속에 더는 지체할 수 없다는 자체 판단에 따라 1984년 자신의 자문 기관으로서 "임시 교육 심의회"를 설치했다. 이후 임시 교육 심의회의 자문을 받으며 여러 교육 정책 수립을 주도하여 나카소네의 퇴임 이후인 1988년에 내각 주도로 "학습 지도 요령"의 개정을 이루었다. 이를 놓고 일본교직원조합(일교조)는 내부 분열에 빠져 세력이 급격하게 약화되었다. 세제 문제에 있어서는 정부세제조사회의 회장으로서 세수의 직간비율을 맞춘다는 관점에서[99] 부가가치세의 도입을 주창한 가토 히로시를 비롯해 이시카와 다다오, 가쓰다 기치타로, 고야마 겐이치, 고보리 게이이치로, 니시 요시유키, 사토 세이자부로 등[100] 자신과 생각을 같이하는 학자들을 각 자문 기관의 중심 인물로 기용해 신속한 결정을 통한 톱다운형 정책 추진에 활용했다. 그러자 자민당 내 비주류파나 야당으로부터 "어용학자의 중용"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1986년에 발생한 이즈오섬 미하라산의 분화 때에는 총리 직권으로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과 남극 관측선을 출동시켜 체류자를 포함한 주민 전원 구출에 성공했다. 직권으로 지시를 내린 데 대해 소관 기관인 국토청의 관료들을 비롯해 야당은 총리의 독단적 결정을 비판했지만, 당시 내각안전보장실장이었던 삿사 아쓰유키 등은 1995년 발생한 한신·아와지 대지진무라야마 내각의 초동 대처 지연과 비교하며 나카소네의 결단력과 실행력을 높게 평가했다. 또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을 둘러싼 산리즈카 투쟁이 당시에도 계속되던 중이었음에도, 나리타 공항 2단계 공사 착공을 결단했다.[101]성풍속 업소의 적발과 선정적인 내용을 담은 TV 프로그램, 영화 규제에도 주력했다. 선정적 TV 프로그램에 관해서는 국회 답변에서 "우선 당분간은 이 부분에 있어서 우정성이 감독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정성 측에서 민영방송 관계자들과도 자주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고, 그래도 불만이 있다면 위에서 직접 검토해서 좋게 처리되도록 할 것이다. 우정성에서는 그걸 잘 체크해보고, 문제가 반복되는 일이 없도록 경고를 하든지 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했으면 한다"라고 말해 이후 일본 TV 프로그램에서 선정적인 내용이 많이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원폭 피해자들이 입원하고 있는 히로시마시의 병원을 시찰한 자리에서 "병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거나 "흑인은 지적 수준이 낮다", "일본에 차별받고 있는 소수민족은 없다"라는 등 나카소네 사무소 관계자가 한 발언에 대해 나카소네 사무소가 사과문을 낸 것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여성 차별적 발언으로 여겨지는 발언을 해서 물의를 빚는 경우도 있었다.

1983년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1986년제3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현직 총리이면서도 지역구에서 1위로 당선되지 않았다(당시 선거 제도는 중선거구제). 이는 역대 총리로는 유일한 기록이다. 나카소네가 1위를 차지하지 못한 두 선거에서 1위로 당선된 것은 모두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인데, 이는 곧 전현직 총리가 같은 선거구(군마현 제3구)에서 대결했다는 것이 된다. 중선거구제 시대의 옛 군마현 제3구는 나카소네와 후쿠다 외에도 총리를 지낸 오부치 게이조일본사회당 서기장을 지낸 야마구치 쓰루오 등 거물들의 지역구로서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경합 지역이었다. 또 일본에서 전직 총리가 선거에서 낙선한 사례는 가타야마 데쓰이시바시 단잔, 가이후 도시키가 있으나, 현직 총리가 선거에서 낙선한 적은 역사상 한번도 없다.

"하이테크 경기"나 "거품 경기"로 대표되는 일본 경제의 호황 속에 내각 지지율도 고공 행진을 이어갔고, 집권 여당인 자민당 역시 중의원과 참의원 선거에서 사상 최다 의석을 획득함과 동시에 임기 후반기에 다나카 가쿠에이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나카소네 정권은 대미 수출에 있어서 고부가가치 제품이 지나치게 호조를 보이면서 미국과의 무역 마찰 문제에 직면했고, 플라자 합의로 이러한 마찰은 해소되었지만 달러화 가치가 하락하고 엔화 가치가 상승하여 일본의 수출 경쟁력이 약화되었다. 따라서 나카소네 내각은 내수 활성화를 위해 "민간 활력"을 내세우며 국철분할민영화에 수반해 일본국유철도 청산사업단국철 소유의 용지를 매각하는 등 대규모로 국유지 매각을 진행했다.[102] 이로 인해 대도시권이나 리조트 개발지를 비롯하여 일본 전국에서 땅값이 폭등했으나 이에 따른 금융긴축정책을 시행하지 않아 거품 경제를 부추겼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또 이런 거품 경제 하에서 횡행한 대규모 주식 투자는 이후 발각되는 리크루트 사건이나 정치인들의 비리 사건에서 불법 자금 문제가 다시 주목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

1986년 중의원참의원 선거가 동시 실시되어 자민당이 압승을 거두었지만, 선거 이후 나카소네는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후지오 마사유키 문부대신이 나카소네의 "자학사관은 부적절하다"라는 발언을 비판하는 글을 잡지에 게재했다가 경질되는가 하면, 나카소네 본인 역시 "흑인은 지적수준이 낮다", "일본은 단일 민족", "여자가 쓴 글이니까" 등의 여러 실언이 도마 위에 올랐고, 나아가 선거 기간 도중 나카소네가 "대형 간접세는 도입하지 않습니다", "이 얼굴이 거짓말하는 얼굴로 보입니까"라며 도입하지 않을 것처럼 말하던 부가가치세를 선거 이후에 돌연 도입하겠다고 선언하면서 "공약 위반"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내각 지지율이 급락했다.

이후 1986년 말, 익년인 1987년도 예산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여야 대립이 격화되어 자민당에 대한 여론이 악화, 익년 4월에 실시된 통일지방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하는 등 나카소네 정권은 위기에 몰렸다. 이후 자민당 3역(간사장, 총무회장, 정무조사회장)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나아가 내각 총사퇴론까지 나오기 시작했다.[117] 여론이 갈수록 악화되자 나카소네는 1987년 5월 부가가치세 도입을 철회하겠다고 선언하지만, 이후 열린 미일 정상회담에서 나카소네가 준국빈 대우를 받은 것과 달리 미국 하원 본회의에서 무역 상대국인 일본에 대한 흑자 삭감을 요구하는 포괄 무역 법안이 찬성 290표, 반대 137표로 여유롭게 통과되는 등 대미 관계에 있어서도 위기에 몰렸다. 이에 미국 NBC가 "나카소네 총리는 '매우 특별한 인사'를 받았다"라고 비꼬기도 했다.

그러나 지방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한 것과 부가가치세 도입을 둘러싼 논란은 아이러니하게도 자민당 당내 결속이 강해지는 결과를 불러온다. 자민당 집행부는 당내에서 더 이상 갈등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고, 나카소네의 후임이 될 차기 자민당 총재는 선거가 아닌 "합의 추대"의 방식으로 정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생겨났다.[117] 나카소네는 이를 이용해 차기 총재 후보로 거론되던 유력 후보 3명을 교묘한 방법으로 분열시켰고, 7~8월경이 되자 나카소네 내각의 지지율이 회복되는 양상을 보이면서 나카소네의 당내 입지 역시 회복, 차기 총재를 나카소네 본인이 직접 정하게 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나카소네 결정). 이후 나카소네는 이른바 "뉴리더"로 불리던 다케시타 노보루, 아베 신타로, 미야자와 기이치 가운데 다케시타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1987년 11월에 약 5년간의 재임을 마치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총리 퇴임 후인 1989년, "전후 최대의 비리 사건"이라는 별명이 붙은 리크루트 사건이 일본 정계를 강타했다. 이는 일본의 부동산 회사인 리쿠르트 코스모스사가 일본의 정재계 인사 76명에게 자사 미공개 주식을 뇌물로 공여한 사건으로, 사건 수사 과정에서 나카소네의 개입 정황이 드러나자 야당은 국회에서 예산 심의를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대신 나카소네의 증인 심문을 요구했으나 나카소네는 이를 거부했다. 뇌물을 받은 76명에 포함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는 사태 발생 직후 사임했고, 나카소네 역시 "리쿠르트 사건에 책임을 지겠다"라며 자민당을 탈당했다.

이후 몇 년 되지 않아 자민당에 복당한 나카소네는 1994년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인 하타 쓰토무 내각이 붕괴한 뒤 자민당 집행부가 일본사회당 소속의 무라야마 도미이치를 총리로 하는 자민당·사회당·신당 사키가케의 3당 연립 정권을 구성하기로 합의하자 이에 반발하여, 오자와 이치로와 함께 가이후 도시키를 독자 총리 후보로 내세웠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나카소네가 당을 배반했으니 징계 처분을 내려야 마땅하다는 자민당 내 일부 세력의 주장도 있었으나, 결국 자민당 집행부는 그동안 나카소네가 당을 위해 공헌한 면을 평가하여 불처분 결정을 내렸다.

한편 하토야마 유키오 등 자민당 내 개혁파 의원들은 리쿠르트 사건을 계기로 정관계 유착의 근절을 목표로 하고 "유토피아 정치 연구회"를 당내에서 설립하여 사건에 연루된 나카소네 등을 규탄했다. 이후 자민당 내 개혁파의 지도자 격인 하토야마가 자민당을 탈당하여 신당 사키가케를 거쳐 1996년에 재야 세력과 민주당을 창당하자 나카소네는 "정치는 우애니 뭐니 하며 아름다운 말을 하고 있지만, 말에 알맹이가 없고 어설픈 측면이 있다.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금방 녹아 버릴 것이다"라며 하토야마를 비판했다. 그러자 하토야마는 "소프트 아이스크림도 여름에는 맛있다"라고 받아쳤고, 이에 하토야마가 강조한 "우애"라는 단어가 1996년 일본 유행어 대상에 선정되기도 했다.

1996년 기타칸토 비례대표구의 종신 1번을 보장받았다. 2003년 5월 2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로부터 중의원 비례대표 73세 정년제 도입을 위해 은퇴를 요청받아 비례대표 공천을 받지 못했다. 차기 중의원 선거 불출마와 의원직 사퇴 의사를 표명하여 정계로부터 사실상 은퇴했다.

2018년 일본 총리 경험자로서 두 번째로 만 100세가 되었다(제1호는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2019년 11월 29일 사망했다(향년 101세).

2. 4. 정계 은퇴 이후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1987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정계에 남아 영향력을 유지했다. 1991년 걸프 전쟁 당시에는 중동 특사로 임명되어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과 회담하고 일본인 인질 전원 석방을 이끌어냈다.[120] 1996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소선거구제비례대표제 병립제가 도입되자, 기타칸토 비례대표구에서 자민당 종신 1번을 보장받았다.[122] 1997년에는 헌정 사상 4번째로 50년 이상 국회의원으로 재직하며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수여받았다.[121]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브라이언 멀로니캐나다 총리, 마거릿 대처영국 총리와 함께 (2004년 6월 11일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장례식에서)


1990년대 후반, 제2차 하시모토 개조내각에서 자신의 심복이었던 사토 고코가 입각했으나, 록히드 사건 연루 혐의로 인해 곧 사퇴하면서 하시모토 내각과 자민당의 지지율이 크게 하락했다. 이는 1998년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의 참패로 이어졌고,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가 사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121] 1999년, 나카소네파는 가메이 시즈카, 히라누마 다케오가 이끄는 가메이파와 합병하여 "시스이카이"가 되었고, 나카소네는 시스이카이의 최고 고문을 맡았다.

2000년 총선거부터 자민당은 비례대표 의원에 한해 73세 정년제를 도입했지만, 나카소네와 미야자와 기이치는 특례로 제외되었다.[122] 그러나 당내외에서 비판이 제기되자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재는 이들에게 은퇴를 권고했다. 나카소네는 이에 대해 "정치적 테러"라며 강하게 반발했지만,[122] 결국 2003년 총선거에 불출마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123]

은퇴 후 나카소네는 세계평화연구소 회장을 맡아 나카소네 야스히로상을 창설하고, 세계 평화와 안보에 관한 연구 업적이 큰 사람에게 수여했다. 2004년부터 2014년까지는 닛폰 TV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토론 프로그램 "본심격론! 나카소네장"의 진행을 맡기도 했다.[124]

2007년, 블룸버그 통신 본사에서 열린 일본외국특파원협회 기자회견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질문에 "개인적으로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답했다.[125] 자신의 회고록에 언급된 '위안소'에 대해서는 "군수 물품 생산원들을 위한 오락 시설"이자 "군인들이 바둑을 치는 등의 휴게의 목적으로 설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126][127]

2008년에는 요미우리 신문에 당시 총리직에서 사퇴할 의사를 밝힌 후쿠다 야스오에 관한 글을 기고하며, 2, 3세 정치인들의 배짱과 근성 부족을 지적했다. 2008년 자택에서 넘어져 오른쪽 어깨 골절상을 입었으나, 회복 후 하토야마 이치로 서거 50주년 기념식에서 연설하는 등 공개 활동을 재개했다. 2013년에는 95세 축하회가 열렸고, 2015년에는 요미우리 신문에 전후 70년을 맞아 장문의 기고를 하는 등 건재함을 과시했다. 2018년에는 일본 역대 총리 역임자 중 헌정 사상 두 번째로 100세 생일을 맞았다. 2019년 11월 29일, 나카소네는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101세.

3. 정치적 입장 및 논란

고이즈미 내각의 최대 업적으로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자위대를 파병한 것"을 꼽았으며, 최대 잘못은 "참의원에서 부결된 우정민영화 법안을 무리하게 재추진하기 위해 중의원을 해산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이즈미의 우정민영화에 대해 "고이즈미 내각은 정치의 바른 길, 예를 들면 재정 및 행정 개혁이랄지 교육 개혁 같은 것을 이룬 게 아니라 그저 우정 사업을 민영화했을 뿐이다. 사실 우정민영화는 고이즈미 내각 이전부터 정부 내에서 그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던 것인데, 그걸 고이즈미 내각이 주워 먹었다. 그러고는 "극장 정치"의 소재로서 재미있게 써먹었던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런 게 바로 '인상파 정치'인 것 같다"라고 비판했다.[208][135]

자유민주당과 민주당의 대연립을 비밀리에 중재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나카소네파가 미키파와 함께 보수 측류로 취급되는 것에 반발했다. 보수 본류는 일반적으로 요시다 자유당 계열의 이케다파·사토파 계열을 가리키며, 사토파·호리계와 합동한 후쿠다파까지 포함시키는 경우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나카소네파는 포함시키지 않는다.

마쓰무라 겐조로부터 "붉은 갑옷을 입은 젊은 무사"라는 찬사를 받았던 신인 의원 시절부터, 한 파벌을 이끌었던 시대에서 헤이세이 시대까지 보수 정계의 한 축을 담당했다. 보수 합동 이전에는 야당, 자민당에서도 비주류 시절이 길었으며, 보수 본류의 적통이라고 할 수 있는 미야자와 기이치와는 다른 의미에서 국회와 내각, 파벌 거래의 이면을 아는 산 증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본인도 긴 정치 생활을 배경으로 과거와의 비교 등의 발언을 자주 했다.

특히, 보수 합동의 주역이자 자민당 역사상 최고의 책사로 이름을 날린 미키 타케키치를 비유로 사용하여, 그 시대의 참모형·조정형 정치가를 치켜세우는 수단으로 삼았다. 스즈키 내각 시절의 가네마루 신에 대해서는 "미키 타케키치 이래의 인재다"라고 추켜세웠고, 가토의 난 진압 후의 노나카 히로무에게는 "미키 타케키치를 뛰어넘었네"라고 칭찬했다.

1989년, "전후 최대의 비리 사건"으로 불리는 리크루트 사건이 일본 정계를 강타했다.[118] 리쿠르트 코스모스사가 일본 정재계 인사 76명에게 자사 미공개 주식을 뇌물로 제공한 이 사건에 나카소네의 개입 정황이 드러나면서, 야당은 국회에서 나카소네의 증인 심문을 요구했으나 나카소네는 이를 거부했다. 뇌물을 받은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는 사임했고, 나카소네 역시 "리쿠르트 사건에 책임을 지겠다"라며 자민당을 탈당했다.[118]

이후 자민당에 복당한 나카소네는 1994년 하타 쓰토무 내각이 붕괴한 뒤, 자민당이 일본사회당무라야마 도미이치를 총리로 하는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하자, 오자와 이치로와 함께 가이후 도시키를 독자 총리 후보로 내세웠지만 실패했다. 자민당 내 일부는 징계 처분을 주장했으나, 당은 나카소네의 공헌을 고려하여 불처분 결정을 내렸다.

하토야마 유키오 등 자민당 내 개혁파 의원들은 유토피아 정치 연구회를 설립하여 나카소네 등을 규탄했다. 1996년 하토야마가 민주당을 창당하자, 나카소네는 "정치는 우애니 뭐니 하며 아름다운 말을 하고 있지만, 말에 알맹이가 없고 어설픈 측면이 있다.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금방 녹아 버릴 것이다"라며 비판했다. 하토야마는 "소프트 아이스크림도 여름에는 맛있다"라고 반박했고, "우애"는 그 해 유행어 대상에 선정되었다.[119]

나카소네는 총리 퇴임 후 의회 맨 뒷자리에 앉았으며, 미야자와 기이치, 다케시타 노보루와 함께 졸고 있는 모습이 매스컴에 의해 자주 풍자되었다.

1985년 8월 15일, 나카소네는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처음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했다. 그러나 1986년에는 참배를 중지했다.[163] 국회의원 용퇴 후에는 A급 전범 분사 추진[163]이나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반대 등 주장을 크게 전환했다. 2004년에는 "총리대신이 아니라 천황 폐하가 참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총리대신의 큰 일이다"라고 말했다.[163]

을 즐겨하고 도겐의 『정법안장』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165]

통일교 교주 문선명1992년 특례 조치로 일본에 입국했을 때 회합을 가졌다.[166] 1994년에는 문선명의 측근인 박보희와 회담하고, 1991년 문선명과 김일성의 회담 보고를 받았다.[167] 2006년 천주평화연합 (UPF) 일본대회에 축전을 보냈다.[168] 문선명은 1988년 설교에서 1986년 제3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시 일본의 돈으로 60억 엔 이상 썼다고 말했다.[169]

총리 재임 중, 나카소네의 5개 정치 단체에 재팬라이프(ジャパンライフ)로부터 총 1000만 엔의 정치자금이 제공되었다는 사실이 일본공산당에 의해 추궁당했다.[170]

3. 1. 헌법 개정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헌법 개정을 본인의 "평생 숙원"으로 여겼다. 정계 은퇴 이후에도 "신헌법제정의원동맹"의 회장을 맡는 등 개헌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개헌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개헌을 자신의 평생의 과업으로 삼고 있다. 의원 은퇴 후에도 신헌법 제정 의원 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3. 2. 외교 및 안보

1990년 8월에 시작된 걸프 사태에서는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과 회담하여 체류 중인 일본인 74명의 석방을 실현했다.[120] 당시 회담 기록은 2021년 12월 22일에 공개되었다.[120] 미국과의 동맹이 깨질 가능성에 대비하여 일본은 핵무장을 준비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3. 3. 역사 인식 및 기타 논란

1989년, "전후 최대의 비리 사건"으로 불리는 리크루트 사건이 일본 정계를 강타했다.[118] 리쿠르트 코스모스사가 일본 정재계 인사 76명에게 자사 미공개 주식을 뇌물로 제공한 이 사건에 나카소네의 개입 정황이 드러나면서, 야당은 국회에서 나카소네의 증인 심문을 요구했으나 나카소네는 이를 거부했다. 뇌물을 받은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는 사임했고, 나카소네 역시 "리쿠르트 사건에 책임을 지겠다"라며 자민당을 탈당했다.[118]

이후 자민당에 복당한 나카소네는 1994년 하타 쓰토무 내각이 붕괴한 뒤, 자민당이 일본사회당무라야마 도미이치를 총리로 하는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하자, 오자와 이치로와 함께 가이후 도시키를 독자 총리 후보로 내세웠지만 실패했다. 자민당 내 일부는 징계 처분을 주장했으나, 당은 나카소네의 공헌을 고려하여 불처분 결정을 내렸다.

하토야마 유키오 등 자민당 내 개혁파 의원들은 유토피아 정치 연구회를 설립하여 나카소네 등을 규탄했다. 1996년 하토야마가 민주당을 창당하자, 나카소네는 "정치는 우애니 뭐니 하며 아름다운 말을 하고 있지만, 말에 알맹이가 없고 어설픈 측면이 있다. 소프트 아이스크림처럼 금방 녹아 버릴 것이다"라며 비판했다. 하토야마는 "소프트 아이스크림도 여름에는 맛있다"라고 반박했고, "우애"는 그 해 유행어 대상에 선정되었다.[119]

나카소네는 총리 퇴임 후 의회 맨 뒷자리에 앉았으며, 미야자와 기이치, 다케시타 노보루와 함께 졸고 있는 모습이 매스컴에 의해 자주 풍자되었다.

1985년 8월 15일, 나카소네는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처음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했다. 그러나 1986년에는 참배를 중지했다.[163] 국회의원 용퇴 후에는 A급 전범 분사 추진[163]이나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반대 등 주장을 크게 전환했다. 2004년에는 "총리대신이 아니라 천황 폐하가 참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총리대신의 큰 일이다"라고 말했다.[163]

을 즐겨하고 도겐의 『정법안장』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165]

통일교 교주 문선명1992년 특례 조치로 일본에 입국했을 때 회합을 가졌다.[166] 1994년에는 문선명의 측근인 박보희와 회담하고, 1991년 문선명과 김일성의 회담 보고를 받았다.[167] 2006년 천주평화연합 (UPF) 일본대회에 축전을 보냈다.[168] 문선명은 1988년 설교에서 1986년 제3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당시 일본의 돈으로 60억 엔 이상 썼다고 말했다.[169]

총리 재임 중, 나카소네의 5개 정치 단체에 재팬라이프(ジャパンライフ)로부터 총 1000만 엔의 정치자금이 제공되었다는 사실이 일본공산당에 의해 추궁당했다.[170]

4. 주요 정책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은 전후 자민당 정권 중 가장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 색채가 짙었다. 일본전매공사, 일본국유철도(국철), 일본전신전화공사 등 3개 공기업을 민영화했다. 또 오랫동안 정부와 민간이 절반씩 주식을 소유했던 국책 항공사일본항공의 완전 민영화를 추진했다.

나카소네는 1910년 한국 병합을 정당화한 문부대신을 해임했다.

경제 분야에서 나카소네의 가장 주목할 만한 정책은 일본국유철도의 해체를 가져온 민영화 계획이었다. 이는 8만 명의 구조조정으로 이어졌다. 그는 또한 일본전신전화공사와 일본전매공사를 민영화하여 NTT(Nippon Telegraph and Telephone Corporation)와 JT(Japan Tobacco Inc.)를 설립했다. 3개 공기업의 민영화는 직원 수 감소와 직원당 순이익, 생산성, 매출의 상당한 개선으로 이어졌다. 일본노동정책훈련연구소의 보고서에 따르면, NTT와 JT 민영화 20년 후, JR 민영화 16년 후 직원 수는 JT 35%, NTT 65%, JR 70% 감소했다. 또한 NTT, JT, JR의 순이익은 각각 8배, 5.5배, 3배 증가했다. NTT, JT, JR의 생산성은 각각 3배, 2.5배, 1.5배 증가했다. NTT와 JR의 매출은 각각 2.2배, 1.2배 증가했다. 나카소네는 그의 경제 개혁에 대해 "일본 구조의 일종의 "개선"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적었다. 그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110년 동안 일본은 미국과 영국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1970년대에 우리는 따라잡았습니다. 그 이상의 [국가] 규제는 경제 성장의 걸림돌일 뿐입니다. 정부 관리가 권력을 너무 많이 가지면 민간 경제 부문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스템을 바꿔야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전후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관료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잃었다. 1985년 나카소네는 일본은행 전 총재 마에카와 하루오를 일본 경제 미래에 대한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1986년 위원회는 일본이 무역 파트너들의 분노를 사고 있던 수출이 아닌 내수를 통해 성장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나카소네는 일본 국민들에게 외국산 수입품을 구입할 것을 권고했으며, 대대적인 쇼핑 여행에서 미국산 테니스 라켓, 이탈리아산 넥타이, 프랑스산 셔츠를 구입했다. 그는 "일본은 항상 이기는 마작(麻雀) 선수와 같습니다. 조만간 다른 선수들은 그와 함께 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일본 국민들은 회의적이었지만, 이 위원회는 특히 미국에서 좋은 인상을 남겼다. 미국 국무부 경제 담당 차관보(Under Secretary of State for Economic Affairs) W. 앨런 월리스(W. Allen Wallis)는 이를 일본 전후 경제 정책의 분수령이라고 불렀다.

1986년의 중참 동시 선거에서는 중참 모두 자민당 역사상 최다 획득 의석이 되는 압승을 거두었고, 그 공으로 총재 임기가 1년 연장되었다. 그러나, 경제 정책에서는 미국의 무역 적자 해소를 위해 플라자 합의에 의한 엔고 달러 약세 정책을 채택하여, 이것이 결과적으로 일본을 버블 경제에 돌입하게 한 점도 있어,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1982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는 일본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아베 신타로 외무대신과 함께 소련 및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개선에 힘썼다. 나카소네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의 돈독한 관계, 소위 "론-야스(Ron-Yasu)" 우정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나카소네는 미국과의 보다 평등한 관계를 추구하며 "레이건 대통령은 투수이고 저는 포수입니다. 투수가 사인을 주면 최선을 다해 협조하겠지만, 투수가 가끔 포수의 사인을 따르지 않으면 경기를 이길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나카소네는 일본이 태평양에서 "침몰하지 않는 미국의 항공모함"이 될 것이며, 소련 잠수함의 통과를 막기 위해 "일본 열도를 통과하는 4개 해협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치적 반대자들로부터 반동적이고 "위험한 군국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나카소네는 "국가는 어떠한 수치심도 버리고 영광을 추구하며 나아가야 한다"고 응수했다. 그러나 그의 헌법 9조 개정 시도는 실패했다.

1984년 나카소네는 일본의 중화인민공화국 외교 승인 12주년을 맞아 중국을 방문했고, 중국 정부는 3,000명의 일본 청년들을 위한 중국 관광을 주선했다. 이 여행에서 나카소네의 아들은 당시 중국 공산당 총서기였던 후야오방의 딸과 함께 사적으로 동행했다. 이 사건 이후 후야오방은 사치스럽고 과도하게 친밀했던 행사에 대해 중국 공산당 내 다른 구성원들의 비판을 받았다. 또한 나카소네는 1986년부터 1987년까지 필리핀과 일본 간의 일련의 회담에서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을 방문하여 양호한 경제 및 무역 관계를 구축했다.

나카소네는 또한 민족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일본인들의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시키려고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본이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는 주장을 하는 '일본인론' 이론의 신봉자였다. 일본 철학자 와쓰지 데쓰로의 영향을 받은 나카소네는 일본의 "몬순 문화"가 중동의 사막 문화에서 나온 유대-기독교적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달리 특별한 일본적 연민을 불러일으켰다고 믿었다. 1986년 연설에서 나카소네는 몬순 문화를 해외에 전파하는 것이 일본의 국제적 사명이라고 말했다.

198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 종전 40주년에 나카소네와 그의 내각은 전쟁 희생자들, 즉 전쟁 범죄자들까지도 매장된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조문복을 입고 방문했다. 이는 그가 공식적인 자격으로 신사를 방문하여,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전투에서 사망한 조상들의 영혼에 대한 일본 정부의 존경을 재확인하려는 의도였기 때문에 큰 상징적 의미를 지녔다. 그러나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그리고 그 신문인 인민일보를 포함하여)의 강력한 비판을 받고 베이징에서 분노한 시위로 이어지는 논란이 많은 행동으로 판명되었다. 또한 국내 반대자들로부터 종교와 국가의 분리를 규정한 헌법을 위반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나카소네는 자신의 행동을 두고 "일본의 진정한 방위...는 서로 평등한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결합을 통해서만 가능해집니다... 그 방식은 인종의 자결에 기초해야 합니다"라고 변호했다. 그는 또한 "전쟁 전 일본의 잘못과 결점을 비판하는 것이 진보적인 것으로 여겨지지만, 저는 그러한 생각에 단호히 반대합니다. 국가는 전쟁에서 승리하든 패하든 여전히 국가입니다"라고 말했다.

나카소네는 또한 교육 개혁을 추진하여 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보고서는 어린이들에게 "애국심"과 함께 장로와 권위에 대한 존경심을 심어줘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는 완전히 시행되지 않았고 일본교원조합의 공격을 받았다. 이 위원회는 또한 기미가요를 가르치고 입학식과 졸업식에서 욱일기를 게양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역사 교과서도 개정되었다.

나카소네는 1986년 9월 미국인이 일본인보다 평균적으로 지능이 낮다고 주장하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미국에는 많은 이민자, 푸에르토리코인, 멕시코계 미국인, 흑인이 있어 평균 수준을 낮추고 있다"고 말했고, "오늘날 미국에는 여전히 읽을 줄 모르는 많은 흑인들이 있다"고도 말했다. 그런 다음 그는 "문제가 있는" 소수 민족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경제적 성공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일본에 거주하는 아이누 민족은 이 발언이 그들에 대한 인종 차별의 현실을 무시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1987년 그는 예산 적자를 줄이기 위한 정책으로 직접세 부담을 줄이기 위해 부가가치세 도입을 시도한 후 사임해야 했다.

5. 평가 및 영향

고이즈미 내각의 최대 업적으로는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자위대를 파병한 것"을 꼽았으며, 최대 잘못은 "참의원에서 부결된 우정민영화 법안을 무리하게 재추진하기 위해 중의원을 해산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이즈미의 우정민영화에 대해 나카소네는 "고이즈미 내각은 정치의 바른 길, 예를 들면 재정 및 행정 개혁이랄지 교육 개혁 같은 것을 이룬 게 아니라 그저 우정 사업을 민영화했을 뿐이다. 사실 우정민영화는 고이즈미 내각 이전부터 정부 내에서 그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던 것인데, 그걸 고이즈미 내각이 주워 먹었다. 그러고는 "극장 정치"의 소재로서 재미있게 써먹었던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런 게 바로 '인상파 정치'인 것 같다 (웃음)"라고 인터뷰에 답하기도 했다.[208]

; 와타나베 쓰네오

"내가 평기자이고, 나카소네 씨가 아직 정치 신인이었을 때부터 매주 토요일에는 어김없이 독서 모임을 했고, 책을 읽는 데만 열중했다. 밤에 둘이서 술을 마실 때도, 대화는 온통 독서 이야기, 정치 이야기 뿐이었다. 그 같은 공부인, 독서인은 다른 것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 고이즈미 총리 때 마음대로 비례대표 정년제를 만들어 나카소네 씨가 국회의원직에서 85세에 억지로 은퇴했을 땐 정말 화가 났다. 나는 그의 겸손한 생활에 감명받고 있다. 나에게 그 이상으로 경애한 인물은 없다."

; 니카이 도시히로

"나라에 큰 문제가 있을 때마다 나침반 역할을 했다. 항상 상황의 전체적 흐름과 역사적 배경을 고려하며 판단한 정치인이었다."

; 오자와 이치로

"말 그대로 전후 정치를 총결산한 훌륭한 지도자였다."

; 후와 데쓰조 (전직 일본공산당 위원장)

"총리 재임 중에는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입장에 있었지만 솔직한 토론을 할 수 있는 정치인이었다."

; 에다노 유키오

"학식이 넘치고 의연했다. 배울 점이 많은 정치 선배였다."

; 다마키 유이치로

"등에 '일본'이라는 척추가 곧게 뻗은 기개 있는 정치인이었다."

; 시모무라 하쿠분

"전후 역사에 길이 남을 대재상이다. 그의 생전에 헌법 개정을 못한 것은 후배 정치인의 책임이다."

; 야마구치 나쓰오

"자민당을 기초부터 설계한 원조 당인파이다. 시대의 격랑을 극복하고 국민에게 무엇인가를 남겨주겠다는 기개를 가지고 일했다."

; 오시마 다다모리

"시대를 읽는 깊은 통찰력과 확고한 신념 및 뜻을 가지고, 그것들을 실현하기 위해 유연하고 대담한 정치 수법을 사용한 위대한 정치인이었다."

; 가사이 요시유키 (나카소네의 대학 후배)

"국철분할민영화는 나카소네 전 총리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실현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철도가 오늘날 엄청난 발전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매우 큰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 다나카 시게루

"정치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확고한 신념과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결연, 존연, 수연의 '삼연'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국철 개혁 등을 실현하면서 한편으로는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면이 있었다. '역사로부터 배우라'라고도 자주 말했었다. 지극히 일본인적인 합리주의자였다."

; 후루카와 데이지로 (전직 후생성 관료)

"내가 일했던 여러 내각 중 고토다 마사하루 씨가 관방장관을 지낸 나카소네 내각이 가장 좋은 내각이었던 것 같다. 해야 할 일이 명확했으며 그것을 의연하게 실천하는 내각이었다."

; 호리 고스케

"파벌은 달랐지만 나카소네 총리가 잘 챙겨주었다. 매사에 매우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한동안 그의 인정을 못 받다가 야당 시절에 자민당의 헌법 개정 초안을 마련해 발표한 뒤, 비로소 인정을 받았다."

; 이나바 야마토

"근래 대부분의 총리들과는 달리 본인의 생각을 말로만 밝히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기는 편이었다. 그에게서 정치인은 신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배웠다. 국민과 국가의 앞날을 늘 진심으로 생각하셨던 분으로, 곧 '국사(國士)'였다."

; 스즈키 데쓰오 (저널리스트)


  • "그가 말하는 개헌론에는 반드시 '국민 모두가 개헌 논의에 참여해야 한다'라는 원칙이 있었다. 현재의 개헌 논의를 보면 여당이나 야당이나 개헌을 나가타초(국회)에서의 정쟁의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고, '헌법은 국민의 것'이라는 대전제를 결코 무너뜨리지 않고 그 바탕 위에서 개헌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 나카소네 씨의 개헌론의 특징이다."

  • "그의 별명인 '풍향계'는 '상황에 따라 본인의 신념을 쉽게 바꾼다'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가 '현실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상이나 신념이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정치를 움직일 수 없다. 이상과 현실을 잘 구분하는 것이 정치인의 기본 자세이다. 나카소네 씨가 그 균형을 잃지 않았기에 총리가 되어서도 국철이나 전철공사 민영화 등의 핵심 정책을 실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 나카소네 쓰타코 (나카소네의 배우자)

"결혼 사기를 당했다. 관료와 결혼하면 평온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시집온 것이었는데, 중간에 나와 무엇 하나 상의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관료를 그만두더니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결국 선거 치르느라 평온한 삶은 물 건너갔다."

小泉내각(内閣)의 최대 업적으로 "아프가니스탄이라크에서의 국제적 기여를 목적으로 한 자위대의 해외 파병"을 꼽는다(중젠(中曾根)도 제3차 내각에서 이란-이라크 전쟁에서의 소해정 파병을 검토했다). 또한 최대 실책으로 "헌정의 상도에 어긋나게, 참의원에서 부결된 우정민영화법안을 통과시키려고 중의원을 해산한 것"( 우정해산 )을 지적했다. "소이즈(小泉) 내각은, 내가 했던 것과 같은 정치의 본도―예를 들어 재정이나 행정개혁, 교육―가 아니라, 도로와 우정만을 했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가장자리의 일이다. 그것을 극장 정치로 재미있게 했지. 내게 묻는다면 인상파의 정치다(웃음)"라고 인터뷰에서 답하고 있다.[135] 또한, 소이즈(小泉) 총재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이유로, 자민당의 신헌법 기초위원회에서는 전문 소위원장이었던 중젠(中曾根)이 작성한 헌법 전문의 시안은 사용되지 않았다.

  • 다나카 가쿠에이 "정치가의 자질은 50명 앞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 500명 앞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 1000명 앞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5000명 앞에서 이야기하여 잡담 없이 꼼짝 않고 경청하게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현재로서는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다나카 가쿠에이 정도일 것이다."

  • 와타나베 츠네오
  • *"평 기자였던 제가 나카소네 씨가 아직 무소속 의원이었던 시절부터 매주 토요일에는 꼭 독서회를 열고 좋은 책을 탐독했다. 밤에 둘이서 술을 마실 때도 화제는 독서 이야기, 정치 이야기뿐이었다. 그런 학구파, 독서가는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한다. 고이즈미 총리 시절, 독단적으로 국회의원 정년제가 만들어져 국회의원을 85세에 강제로 은퇴하게 되었을 때는 정말 분개하고 있었다. 검소한 생활에도 감명을 받았다. 저에게 있어 그 이상으로 존경하는 인물은 없다."[144]
  •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나카소네 씨는 모두 정치 이야기다. 그와 음담패설을 해도 안 된다. 관심이 없다. 아내 일색으로, 두 번째 부인을 두지 않은 정치가는 그와 아베(신조) 총리 정도 아닌가(웃음). 가족은 매우 사이가 좋았다. 옛날에는 의원 숙소 8첩 1칸에 부모 2명, 자녀 3명과 하녀 1명 등 6명이서 살았다. 돈이 없어서 요정에 갈 수 없어서 밤에 하녀를 깨워 그녀의 이불 위에 쟁반을 놓고 그 위에 술병을 올려놓고 마셨다. 옆에서는 아이들이 숙면하고 있었다. 어느 때 나카소네 씨가 베르사유 궁전 같은 호화로운 곳으로 이사했으니 와 달라고 해서 가보니 새로운 의원 숙소로 8첩, 6첩, 4.5첩 등 세 개의 방이 있었다. 그래서 베르사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드디어 장관이 될 때 '호화 저택'을 지었다고 한다. 가보니 건평 40평 정도의 평범한 집이었다. 뜰 같은 연못이 있고, 거기에 금붕어가 4, 5마리 헤엄치고 있었다. 따님에 따르면, 나카소네 씨는 정치가는 작은 빌라에 살아야 한다고 말했었다고 한다. 그 후, 총리가 될 때에는 나가시마 시게오 씨의 집을 빌려 살았다. 처음에 나가시마 씨는 정치가는 싫다고 거절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해 달라고 나카소네 씨에게 부탁을 받았다. 그래서 나가시마 씨에게 정치가라고 해도 나의 절친이니 빌려주라고 말했다. '호화 저택'은 복도도 스칠 수 없을 정도의 집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매주 토요일에 독서회를 했다. 일주일에 한 권, 제가 읽고 보고하고, 그것에 대해 토론을 한다. 1년에 40권 이상이다. 정치학 논문 같은 딱딱한 책뿐이었다. 서로 상당히 공부가 되었다. 그와 학자를 불러서 식사회도 많이 했다. 칸트도 헤겔도 제가 읽으라고 하면 나카소네 씨는 모두 읽는다. 뭐, 그 정도로 학구파 정치가는 없었다. 나카소네 씨는 고르바초프의 소련과도 잘 지냈고, 한국과도 좋은 관계를 구축했다. 총리로서 처음으로 방한했을 때는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 벼락치기 공부로 괜찮을까 생각했는데 한국에 가서 한국어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욕실에서 열심히 연습한 것 같다. 열정적이다. 그런 번거로운 일, 보통은 하지 않는다." [145]

  • 가네마루 신 "애초에 다나카 파는 나카소네를 총리로 하는 것에 반대였다. 그런데 다나카의 아버지가 꼭 나카소네라고 한다. 고토다가 어째서 저런 낡은 미코시(신을 모시는 가마)를 짊어지느냐고 하자, 아버지가 낡았으니 짊어진다고 말했다. 거기서 제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파벌에서 나가라고 하자 모두 수그러들었다. 저는 나카소네를 몹시 싫어하는 사람으로 통했다. 그런 제가 찬성했으니 나카소네는 은혜를 느꼈을 것이다. 총리가 된 때 요정에 불려갔다. 나카소네는 다다미에 손을 대고 깊이 고개를 숙여 당신을 장래 간사장으로 한다고 말했다."

  • 고토다 마사하루
  • *"전후 총리대신 중에서 나카소네 총리는 뛰어난 총리대신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물론, 나카소네 총리에게는 페르시아 만에 자위대를 파병하려 할 정도로 그 성격에서 비롯되는 위험성이 있다. 하지만 그는 정치가가 된 이래 (중략) 정책을 공부하고, 축적해 왔다. 총리가 되면 무엇을 실행할 것인가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최근에 보이는 것 같은 '임시변통'의 총리가 되는 사람들과는 달랐다."[146]
  • *"미야자와(키이치) 씨는 너무 성실하다. 머리가 너무 좋아서 앞이 너무 잘 보인다. 그러므로 하려고 하는 일에 기세가 없다. 그 점, 나카소네 씨는 머리가 좋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힘이 있다."[147]

  • 니카이 겐스케 "나라의 큰 문제에서 나침반의 역할을 했다. 항상 대국과 역사에 입각한 정치가였다."[148]

  • 후와 테츠조 "총리 재임 당시에는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입장에 있었지만, 솔직한 토론을 할 수 있는 정치가였다."[148]

  • 타마키 유이치로 "등에 '일본'이라는 척추가 똑바로 박힌 기골이 있는 정치가였다."[148]

  • 시모무라 하쿠분 "전후사에 남을 대재상. 생전에 헌법 개정을 하지 못한 것은 후배 정치가의 책임이다."[148]

  • 야마구치 나츠오 "자민당을 기초부터 만든 근본적인 당인파. 시대의 풍파를 극복하고, 국민에게 무언가를 남기겠다는 기개를 가지고 임했다."[148]

  • 오시마 타츠모리 "시대를 읽는 깊은 통찰력, 확고한 신념과 이상을 가지고, 그것들을 실현하기 위해 유연하고 대담한 정치 수법을 휘두른 위대한 정치가였다."[148]

  • 가시와기 케이유키 "국철의 분할 민영화는 나카소네 전 총리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결과가 철도의 오늘날 발전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매우 큰 공적을 남겼다."[149]

  • 타나카 시게루 "정치가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 결연, 존연, 수연의 '삼연'을 소중히 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국철 개혁 등을 실행하면서도 인연을 소중히 하는 면이 있었다. '역사로부터 배우라'고도 자주 말했다. 극히 일본적인 합리주의자였다."[150]

  • 후루카와 사다지로 "섬긴 가운데 고토다 마사하루 씨가 관방장관을 지낸 나카소네 내각이 가장 좋은 내각이었다고 생각한다. 해야 할 일이 명확하고, 당당한 자세로 실행하는 내각이었다."[150]

  • 호리 다이스케 "파벌은 달랐지만, 눈여겨봐 주셨다. 매우 적극적이고 노력하는 분이었다. 야당 시절에 정리한 자민당의 헌법 개정 초안을 잘 듣고, 평가해 주셨다."[150]

  • 이나바 야마토 "근년의 많은 총리들과는 달리, 이념을 입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이 따르는 분이었다. 정치가는 신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쳐 주셨다. 국민과 국가의 앞날을 항상 진심으로 생각하는 분으로, 바로 '국사'였다."[151]

  • 스즈키 테츠오
  • *"그가 말하는 개헌론에는 반드시 '국민이 모두 제대로 논의해서'라는 서두가 붙어 있었다. 현재의 개헌 논의는 여당을 봐도 야당을 봐도, 나가타초 내부에서의 정쟁의 도구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한 차원이 아니라, '헌법은 국민의 것이다'라는 대전제를 결코 무너뜨리지 않고, 그 위에서 개헌을 주장했던 것이 나카소네 씨의 개헌론의 특징이다."[152]
  • *"'풍향계'라는 말은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바꿔 말하면 '현실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자신의 이상이나 신념이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정치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상과 현실주의를 잘 구분하는 것이 정치의 묘미이다. 그 균형을 잘 맞출 수 있었기에 총리가 되고, 국철이나 전전공사의 민영화 등 큰 정책을 실현할 수도 있었다."[152]

  • 후카야 타카시 "나카소네 씨는 거의 화를 내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화를 내는 척하면서, 끈질기게 설득하는 것이다. '이 직책을 차면, 네 장래를 위해 좋지 않다'고. 저는 이를 받아들여 청년국장에 취임했다. 나카소네 씨는 젊은이의 건방짐을 용인하는 그릇이 있는 사람이었다. (소비세에 반대하고) 이렇게 나카소네 씨를 곤란하게 했는데도, 징계를 받지 않았다. 싫은 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 '내 험담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조차 전혀 제 귀에 들어온 적이 없다. 남의 일을 몰래 비판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얼마 후 저를 유럽 여행에 초대해 주었다. 멋쩍어서 나카소네 씨를 피하고 있던 저를." [153]

  • 카미와다 요시히코 "다나카(가쿠에이)는 천재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 노력해서 올라왔다고 불리고 싶다. 나카소네는 천재가 아니라 수재다. 노력해서 총리가 되었다. 그런데 본인은 천재라고 불리고 싶다. 수재라고 불리면 기분이 나빠진다. 두 사람은 모든 것이 정반대다."

  • 무라카미 마사쿠니 "1986년, '죽은 척 해서 하는 해산'이라고 불린 중참 더블 선거에서 저는 나카소네 총리의 전국 유세에 모두 동행했다. 그때 놀랐던 것은 나카소네 씨는 아무리 빡빡한 일정이라도 비행기 안, 신칸센 안에서 졸지 않았다. 두꺼운 책을 가방에서 꺼내서 물어보니 '대전제'의 책이라고 한다. 황실전범과 황실의 제사에 대해, 쪽지를 붙여 공부하고 있었다. 당시, 쇼와 천황이 고령이었고, 게다가 병도 있었기 때문에 총리로서 만일의 사태를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선거 기간이므로 '총리,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건의하자 '아니, 무라카미 군, 지금 내가 총리로서 해야 할 일은 한 글자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지금은 궁중 의식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154]

  • 하토리 류지 "말년에 여러 번 나카소네 씨에게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미 90세 전후였는데도 인터뷰 중 그의 허리는 똑바로 펴 있고, 표정도 초연했다. 다만 한 번, 제가 '정권 중반부터 개헌을 보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라고 물었을 때는 '개헌을 포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격노하셨다. 실제로 정계 은퇴 후에도 개헌 시안을 발표하고 있어 개헌은 숙원이었을 것이다." [155]

  • 모리 와카코 "처음 보았을 때부터 키가 크고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 속기 담당을 해도 완벽할 정도로 쓸데없는 말이 없다. 아직 20대인데, 뛰어나서 감탄했다. 장래에 반드시 수상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모두 동경했다. 제가 속기사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지만, 동료 남성 속기사로부터 미안한 듯이 '다음 차례, 좀 바꿔주지 않겠나'라고 부탁을 받았다. 제가 '누구냐'고 묻자 '나카소네 씨란다'라고 곤란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는 기꺼이 바꿔주었지만, 어려운 말이 술술 나오는 나카소네 씨는 '까다로운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멋있었다." [156]

  • 아카마츠 토시코 "20대 후반 무렵, 국회 내 식당에서 여성 속기사 동료들과 식사를 하고 있자니, 급사가 쟁반에 산더미 같은 귤을 테이블에 가져와서 무뚝뚝하게 '여기, 여기'라고 눈짓을 했다. 안쪽에서 나카소네 씨가 '먹어라, 먹어라'는 듯이 입을 움직이며, 빙긋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서로 안면이 있었으므로, 식당에 주문해서 가져다준 것이다. 우리는 '나카소네 씨로부터의 差し入れ(사시이레)다!'라며 깡충깡충 뛰면서 맛있게 먹은 기억이 있다. 항상 용맹스러운 발언을 하고, 약간 무서운 인상도 있었지만, 근본은 상냥한 사람이구나, 하고 감동했다."

  • 이 나우 "대학원생이었을 때, 나카소네 씨를 직접 뵙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당시 저는 무기수출삼원칙에 의한 제약 속에서 미국에 대한 무기 기술 제공을 인정한 나카소네 씨의 결단에 대해 논문을 쓰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개 자료는 적고, 어떻게 조사를 진행하면 좋을지도 잘 몰라서 매우 곤란했다. 그래서 거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지인을 통해 나카소네 씨에게 질문 편지를 보냈다. 2004년의 일이다. 사전 예상과는 달리, 곧 나카소네 사무소로부터 '만나 뵙겠습니다'라는 답장이 왔다. 국회 근처 사무소를 방문했을 때, 텔레비전과 신문을 통해서만 알고 있는 거물 정치가에게 일본어로 질문해야 한다는 것에 얼마나 긴장했는지. 말문이 막히자 '당신은 한국 유학생이지? 나는 일본 총리로서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단다'. 나카소네 씨는 그렇게 온화하게 말을 걸어, 제 긴장을 풀어주고, 한국에 대한 추억 등을 끼워 넣으면서 제가 제대로 듣고 싶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유도해 주었다. 때로는 저에게 질문을 하기도 하고, 대답에도 흥미로운 듯이 귀를 기울이는 등 상대를 존중하는 자세에도 넘쳐 있었다. 사전 편지에서 주된 관심사를 전달했기 때문에 준비도 해 주셨을 것이다. 나카소네 씨는 제 질문에 대해 당시의 정황 묘사와 함께, 잇따라 구체적인 인명을 들었다. 뛰어난 기억력에 감명을 받았고, 그 덕분에 그 후 당시의 비서관이나 관계 부처 관계자들에게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도 이어졌다. 이러한 조사는 보통 실무자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마지막으로 최고위급에 이르는 것이지만, 제 경우는 마치 반대로 되어 버렸다. '한국에서도, 다른 나라에서도, 더 많은 유학생이 일본에 와 주었으면 한다'. 인터뷰 장소에서 그렇게 격려해 주신 것도 강하게 인상에 남아 있다." [157]

  • 코쿠분 토시히데 (교도통신사 편집국장) "장수를 다한 배경에는 술과 담배가 있다. 담당을 맡지 않았던 시기에도 각 언론사 기자들과 함께 담화하는 기회가 많았다. 어느 때 위스키 물이 나왔다. 그러자 잔 속에 집게손가락과 가운데손가락을 넣고 얼음을 파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라고 묻자 '배를 차게 하는 것이 몸에 가장 좋지 않다'고. 이후, 나카소네 씨의 물은 항상 얼음 없이 되었다. 과음은 결코 하지 않았다. 특히 총리 5년간은 '자위대의 최고 사령관이므로'라고 예측 불허의 사태가 일어날 경우에 대비하고 있었다. 나카소네 씨 이후로 술주정뱅이 총리도 있었지만, 긴장감, 마음가짐이 완전히 달랐다. 담배는 극단적으로 싫어했다. '아침 방문'(아침에 집에 취재에 방문하는 것)의 경우, 선착 두 명까지가 동승하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차에 동승'이라고 불렀다. 어느 때 동승한 어떤 신문사 기자가 차 안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카소네 씨는 운전수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 그 기자에게 '내리십시오'라고 명령했다. 엄격한 어조가 보여주듯이, 담배 연기와 냄새에 참을 수 없었다. 그만큼 건강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바둑, 장기는 하지 않고 마작 등 도박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았다.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여성과의 염문도 없었다. 관심은 정치뿐이었다. 독서는 자주 했다. 읽고 재미있고 참고가 되는 책을 만나면 기자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공부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지금도 서가에 '증정 나카소네'라는 사인이 들어간 책이 몇 권 있다. 나카소네 씨는 '대통령적 총리'를 공언하고 아베 총리의 관저 주도의 원류를 만들었다고 말해진다. 그러나 그 전제로서 나카소네 씨는 반론을 잘 들었다. 나카소네 씨가 살았던 총리 관저에 밤에 실력 정치가들이 몰래 찾아왔다. 신문의 총리 동정에는 실리지 않는다. 의견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유익한 이야기를 들으면, 평소 쓰는 빨간 수첩에 메모하는 것이 상례였다. 다른 파벌에서 기용한 관방장관 고토다 마사하루 씨를 중용했다. 고토다 씨는 때로는 나카소네 씨의 책망하는 역할을 했다. 아부하는 동류 의원과 추측하는 관료만을 관저에 모은 아베 체제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158]

  • 나카소네 야스타카
  • *"집 안에 있어도, 할아버지는 항상 허리가 똑바로 펴져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할아버지'의 표정도 있었지만, '큰 포부를 가진 한 사람의 어른'이라는 아우라가 나왔기 때문에 손자이면서도 압도되는 듯한 감각이 있었다." [159]
  • *"초선 후,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가서 '다행히 당선되었다'고 보고했다. 보통은 처음부터 미소로 맞이한다. 그런데 할아버지에게서는 첫마디로 '역사를 공부하라, 들떠 있을 때가 아니다'라고 엄격한 눈으로 말씀하셨다." [159]
  • *"가정 내에서도, 할아버지는 항상 허리를 펴고, 쓸데없는 시간을 전혀 보내지 않았다. 총리대신이 되어도 바쁘게 지내지 않고,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게다가 매주말에는 절에서 참선을 하거나 수영도 하거나 하면서, 혼자만 되어 생각하는 시간을 만들었다." [159]
  • *"지식을 흡수하는 것을 좋아했다. 저도 그렇게 공부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나이에 관계없이,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대학 시절에는 할아버지에게 '세미나 멤버를 모아라'라고 말씀하셨다. '지금 젊은이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듣고 싶으니 점심에 카레라이스를 먹으면서 의견 교환을 하자'고. 총리대신 경험자로 당시 80세 정도의 할아버지가 20세 대학생의 의견을 테이프 레코더로 녹음하면서 메모를 하면서 듣고 있었다. 이 자세는 대단하다고 생각했고, 할아버지의 지식욕에서 온 행동일 것이다." [159]
  • *"할아버지는 늘 '자신의 몸에 국가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전쟁에서 부하와 동생을 잃고, 폐허를 보는 강렬한 경험에서 이 조국을 부흥시켜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가를 지망하고, 강한 의지가 있었기에 나온 발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죽기 직전까지 '나라가 힘들면 자신도 힘들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군마의 목재상 차남으로 정치와는 관계가 없었던 할아버지는 자신의 지망 하나로 정치가가 되었다. 28세부터 총리대신이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소파벌을 이끄는 가운데 '풍향계'라고 비판을 받았지만, 총리가 되려면 '바람을 읽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도 잘 이해하고 있으며, 도쿠토미 소호의 '대국만 놓치지 않으면 크게 타협해도 좋다'가 모토였다." [159]
  • 나카소네 쓰타코
  • *"결혼 사기와 같은 것이었다. 관리와 결혼하면 평온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시집왔는데, 도중에 아무런 상의 없이 함부로 관리를 그만두었다. 결국 선거만 계속 하게 되었다." [160]
  • *"제 사진을 항상 안주머니에 넣고 있었다고 한다. 첫 임신을 했을 때도 제가 신맛 나는 것을 원하므로, 어느 때는 남편은 회의에 나간 여름 감귤을 먹은 척하고 살짝 주머니에 넣어 가져다준 적도 있었다." [160]

5. 1. 긍정적 평가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전후 일본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그의 정치적 업적과 리더십에 대해 다양한 긍정적 평가가 존재한다.

와타나베 쓰네오는 나카소네가 젊은 시절부터 매주 독서 모임을 갖고 정치와 독서에 몰두했던 학구파였다고 회고하며,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시절 강제 은퇴에 분노했던 일화를 소개했다.[144] 또한, 나카소네가 가족을 소중히 여기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덧붙였다.[145] 고토다 마사하루는 나카소네를 "뛰어난 총리"라고 평가하며, 정책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행력을 높이 샀다.[146]

니카이 도시히로는 나카소네가 국가적 문제에 대한 나침반 역할을 했으며, 항상 대국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판단했다고 평가했다.[148] 오자와 이치로는 "전후 정치를 총결산한 훌륭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했고,[148] 후와 데쓰조는 정치적 대립 속에서도 솔직한 토론이 가능했던 인물이라고 회고했다.[148] 에다노 유키오, 다마키 유이치로, 시모무라 하쿠분, 야마구치 나쓰오, 오시마 다다모리 등 여러 정치인들도 나카소네의 학식, 기개, 리더십, 헌신 등을 높이 평가했다.[148]

가사이 요시유키는 국철분할민영화가 나카소네의 리더십 덕분에 가능했으며, 철도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149] 다나카 시게루는 나카소네가 확고한 신념과 비전을 가진 정치가였으며, '역사로부터 배우라'고 자주 말했다고 회고했다.[150] 후루카와 데이지로는 나카소네 내각이 해야 할 일이 명확하고 의연하게 실천하는 내각이었다고 평가했다.[150] 호리 고스케는 나카소네가 자신을 인정해 준 것에 대해 언급했고,[150] 이나바 야마토는 나카소네가 이념을 실행에 옮기는 정치가였다고 평가했다.[151]

스즈키 데쓰오는 나카소네의 개헌론이 '국민의 것'이라는 대전제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의 '현실주의자'적인 면모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152] 후카야 다카시는 나카소네가 화를 내는 척하면서 끈질기게 설득하는 사람이었고, 젊은이의 건방짐을 용인하는 그릇이 있었다고 회고했다.[153]

무라카미 마사쿠니는 나카소네가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일화를 소개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철저함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154] 하토리 류지는 나카소네가 개헌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언급했다.[155] 모리 와카코와 아카마츠 토시코는 나카소네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했다.[156]

이 나우는 대학원생 시절 나카소네와의 만남을 회고하며, 그의 뛰어난 기억력과 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에 감명받았다고 밝혔다.[157] 고쿠분 도시히데는 나카소네가 건강 관리에 철저했으며, 반론을 경청하고 다른 파벌의 의견도 수용하는 포용력을 가진 리더였다고 평가했다.[158]

나카소네 야스타카는 할아버지 나카소네가 항상 허리를 펴고 공부에 매진했으며, 젊은이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자세를 가졌다고 회고했다.[159] 나카소네 쓰타코는 남편 나카소네가 결혼 전 약속과 달리 정치에 몰두하게 된 것에 대해 "결혼 사기"라고 농담 섞인 불만을 표현하면서도,[160] 남편이 자신을 소중히 여겼다고 회고했다.[160]

다나카 가쿠에이는 나카소네의 대중 연설 능력을 높이 평가하며, 5000명 앞에서 경청하게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고 언급했다. 가네마루 신은 나카소네를 총리로 추대하는 과정에서 다나카 가쿠에이의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고 회고했다.

5. 2. 부정적 평가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평가가 다양하게 엇갈리는 정치인이다. 긍정적인 평가로는 그의 학식, 정치적 식견, 리더십, 그리고 전후 일본 정치에 끼친 영향 등이 거론된다. 특히, 국철분할민영화와 같은 굵직한 정책 결정은 그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149] 와타나베 쓰네오는 나카소네를 학구파이자 독서가로 평가하며, 그의 검소한 생활과 정치에 대한 열정을 높이 평가했다.[144][145] 고토다 마사하루는 나카소네를 "전후 총리대신 중에서 뛰어난 총리대신"이라고 평가하며, 그의 정책적 식견과 실행력을 높이 평가했다.[146]

그러나 나카소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그의 '풍향계'라는 별명은 상황에 따라 입장을 바꾸는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152] 스즈키 테츠오는 '풍향계'라는 별명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나카소네가 현실주의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언급했다.[152] 그의 부인 나카소네 쓰타코는 나카소네가 정치인이 되면서 평온한 삶을 살 수 없게 되었다며 "결혼 사기"라고 농담 섞인 비판을 하기도 했다.[160]

나카소네의 개헌론은 '국민 모두가 개헌 논의에 참여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지만,[152] 현재의 개헌 논의가 정쟁의 도구로 이용되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그의 정책 결정 방식, 특히 무기수출삼원칙에 대한 입장 변화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5. 3. 한국과의 관계

6. 기타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정계에서 바람개비[171], 비갑옷을 입은 젊은 무사[171], 청년 장교, 대훈위[171] 등으로 불렸다. 로널드 레이건과는 론 야스로 함께 불리며 야스[171]라고도 불렸으며, 야스트라다무스[172]라는 별명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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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 일반 나카소네가 역대 일본 총리 중 최초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고 잘못 알려진 경우가 있는데, 역대 총리 중 8월 15일에 "내각총리대신"의 자격으로 참배한 것이 최초일 뿐이다. 실제로 나카소네의 전임자 중 "개인" 자격으로 8월 15일에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총리로는 1975년에 미키 다케오를 비롯해 1978년에 후쿠다 다케오, 1980년부터 1982년까지 3년 연속으로 참배한 스즈키 젠코가 있다.
[199] 웹사이트 Japan May Go Its Own Way on Economic Aid to China : Sanctions: Tokyo argues that Beijing should not be isolated from the world community. Kaifu will see Bush on Saturday. http://articles.lati[...]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1990-07-06
[200] 뉴스 日中青年世代友好代表団220人、14日に訪中 http://japanese.chin[...] 중국망 2008-04-15
[201] 뉴스 胡錦濤主席と中曽根元首相が会談 http://j.people.com.[...] 인민망 2008-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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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 일반 R25 롱인터뷰 Vol. 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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